
단언컨대, 현실을 X선으로 투과함으로써 음하영 회화는 출발되었다. X선으로 바라본 현실, 거기에는 살갗 같은 서사와 피처럼 흘러야 할 의미를 박리한 자리로, 기호와 기하학의 뼈다귀만 앙상히 드러난다. 메마르다 못해 진공이 되어버린 세계다. “그렸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작가의 자백 앞에서 이 그림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것들은 넓은 의미의 ‘엘레지(élégie)’다. 삶은 원인과 결과를 매끈하게 정리한 서사도, 그 끝에서 전리품처럼 주어지는 의미도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슬픔. 그러나 이 애도의 노래가 감추고 있는 것은 음하영과 삶의 공방전이다. 예컨대 작가 노트에서 발견되는, 기억과 그것을 풀어낼 말이 사라질수록 그 감각이 더 순수해지고 진실해진다는 역설은 음하영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우리의 삶에서 이야기와 가치는 결국 나약하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이 없다고 삶이 나약해지진 않는다는 것. 외려 성공한 사람들이 자랑하듯 수많은 에피소드와 교훈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다는 것.
음하영의 시선이 저항하는 자의 것이라기엔 대상을 향한 온기를 숨기지 않고, 매료된 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서늘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의 시선은 서사와 의미의 상실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이면을 꿰뚫어 보는 투명한 시선이다. 이 이미지는 어쩌면 작가가 토대로 삼은 패션 디자인적 시선의 결과처럼 보인다. 화려한 색으로 물든 직물 사이에 숨어있는 박음질을 투시하는 시선이고, 그 매듭마저 걷어낸 이후의 앙상한 도면과 치수―기호와 기하학―까지를 투사하는 시선이다. 음하영은 이 눈을 통해 서사와 의미로 화려하게 디자인된 삶을 ‘탈-디자인’한다. 전통 미학에서 예술의 아름다움은 인식적인 것(서사)과 윤리적인 것(의미)을 함께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가 탈-디자인한 미술은 서사와 의미를 걷어냄으로써 아름다움(beauty) 또한 그저 ‘예쁨(pretty)’으로 해체한다. 《My, Pretty》(4. 18~5. 16 이길이구갤러리)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서사도 의미도 없으니 읽지 말고 느끼라는 미술에 질색하는 이가 적지 않고 그럴 만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음하영은 다르다. 상상력의 빈곤을 탐미주의로 대체하지 않는다. 이 앙상함은 벌거벗은 삶이 지닌 ‘예쁨’에 접근하는 데 가장 적확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그렇다면 〈Wonderfalls〉(2026)는 ‘wonderful(경이로운)’의 언어유희처럼 읽힌다. 경이(wonder)는 추락(fall)하고 만다는 것. 이 그림에는 서사와 의미를 인위적으로 메우도록 유혹하는 관습적인 도상이 등장하지만, 그런 시도는 해석을 미궁으로 내몬다.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 하기보다 도상 자체를 하나의 전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림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만을 간추려 보자. ‘커튼’을 거둔 ‘무대’, ‘집’ 두 채와 ‘구름’ 둘, 마른 ‘벽’ 위로 부유하는 ‘원뿔’, 숫자 ‘4’와 텍스트 ‘SHINES’. 연관 없는 사물의 나열은 상황 설정이라는 목적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작품이 겨냥하는 것이 서사나 의미의 진술이 아니라 어떤 정서(정동)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나 감각의 형태로만 남”은 “기억과 감정이 스치는 순간의 기운”(작가 노트). 사물들의 관계는 얼핏 부조리한 진술로 보이고 초현실적인 풍경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추억’이라는 사유에서 누구나 목격하게 되는 상황이다. 아득한 과거의 어느 다정한 순간을 떠올려 보자. 여기엔 구체적인 사람의 형상이나 사건의 전말, 거닐던 길의 모양새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시간이 서사를 모두 박리해 버린 자리에 오직 파편화된 이미지만이 둥둥 떠다닐 뿐이다. 그날의 ‘경이’는 추락해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족하다. 이 앙상한 조각으로도 삶의 한순간은 ‘빛난다(SHINES)’. 『어린 왕자』의 상자 속 양처럼 ‘집’만으로도 유년의 가족과 지금의 식구를 감지할 수 있고, ‘구름’만으로 그날의 공기가 지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4’는 어쩌면 방위표일지도 모른다. 서사와 의미의 좌표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이 사소한 방위표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가장 진실한 추억으로 내내 당도할 수 있다.

디자인에 대한 무수한 정의가 공통으로 전제하는 것은, 디자인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물에 질서를 강제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탈-디자인적 시선이 대상을 투시할 때 일어나는 일은 유려한 외관에 들러붙은 목적(의미)과 질서(서사)를 벗겨내는 것이다. 〈Paradise〉(2026)에는 두 송이의 꽃과 그것이 펼쳐진 들 그리고 그 뒤로 산봉우리가 보인다. 이들은 모두 투시된 상태다. 꽃이라면 지닐 유기적인 잎맥이 없고, 들과 산이라면 갖출 초목의 복잡함이 없다. 디자인적 시선(목적론적 세계관)에서 산은 물을 품어 들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들은 양분을 내어주며 마침내 꽃을 피우기 위해, 꽃은 다시 씨앗을 뿌려 들과 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의 목적과 수단이 되는 인과율. 그러나 탈-디자인적 투시에서 세 항은 서로를 향한 서사와 의미의 복무를 중단한다. 이제 이들은 캔버스에서 어떠한 맥락도 없이, 오로지 각자의 덩어리와 색면만을 지닌. 철저히 고립되고 독립적인 개체로 앙상하게 ‘직립’할 뿐이다. 그러나 이 고독을 두고 비극적인 외로움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엔 타인의 인정이나 부여된 의미 없이도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서늘하고도 투명한 해방감이 있다. 누구도 금지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연민하지 않는다. 누구도 인간이 신의 목적에 따라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다윈의 말을 믿지 않는다. 기호와 숫자만 남긴 난해한 시인을 아무도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독 속 그들은 돌아가지 않는다. 삶은 그들의 것이었기에.

창작자는 작품을 통제하지 못한다. 작품은 창작자의 의도를 초과하고, 수용자의 해석은 이를 또 한 번 넘어선다. 이것은 즐거운 이중의 배반이다. 그러니 이미지를 서사와 의미라는 관념으로부터 해방한 작가의 자유가, 수용자를 통해 이미지가 다시 관념을 통과할 자유로 이어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음하영 회화의 성취는 어쩌면 이미지(사물)에서 관념을 제거하라는 자유의 ‘선고’가 아니라, 관념과 이미지의 양방을 통행할 수 있는 자유의 문(門) 그 자체를 거느린 데 있지 않을까. 〈My Buttons〉(2026)가 해방한 것을 먼저 짚는다. 앞서 살폈듯 작가는 진술보다 묘사에 몰두한다. 어떤 기계를 통제하기 위해 태어난 버튼은 투명하게 박리돼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자유롭다. 버튼이 기호와 기하학으로 남게 되면, 다이얼을 돌려야 할 손 또한 그 목적에서 벗어날 자유를 얻는다. 이제 자유의 층위가 화면 전체로 번져나간다. 이 진공의 무대라면 작가의 의도를 배반해 캔버스의 하부를 수놓은 ‘별’에 대해서 새로운 목적을, 그러니까 또 다른 서사와 의미를 기입할 수 있다. 별을 길 잃은 자의 나침반으로, 누군가의 간절함을 품는 소망의 표지로 음미하는 것이다. 오로지 삶을 제 뜻대로 휘두르기 위한 ‘생’의 버튼으로서 말이다. 별(삶의 버튼)이 우리가 발붙인 이 땅에 있나니, 노동의 목적에 종사하는 사물과 손이 희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울 테다.
결론을 맺자. 음하영의 회화는 비서사와 무의미의 긴장 속에서 그려진다. 인과를 해명할 이야기가 없고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해 줄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해석을 거부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외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스스로 의미가 있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라고 부추긴다. 기호와 기하학만으로도, 무심한 꽃 사이에서도, 앙상한 별빛 아래서도 우리는 잊고 있던 우리의 ‘예쁨’을 길어낼 수 있다. 음하영의 그림은 무의미하게 그리고 무의미해서 예쁘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 오히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는 대신,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필요를 말해주지 않는, 소명 없는 삶은 뼈다귀처럼 앙상하다. 그래도 믿어야 하지 않나. 살 이유가 있다고. 왜냐하면 우린, 오늘을 견디기로, 삶을 살기로 선택했으니까. 다시, 엘레지를 위하여.
◼︎ 음하영 개인전 《My, Pretty》 전시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