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_박혜수: 어디서 다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박혜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실연수집’ 설문 답변지로 종이학을 접은 뒤 다시 펴서 만든 러브레터를 불도장으로 태움 각 120×170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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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수 없는 갈라섬을 이별離別이라 말하고 제힘으로 갈라섬을 비로소 작별作別이라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지구의 것이 아니길 바랐던 이 ‘별別’의 일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다. 전자의 별이 노도처럼 존재를 제 마음대로 어디든 도착하지 못하도록 휘젓는 일이라면, 후자의 별은 그 출렁임과 허우적거림에 대한 인정, 선택 그리고 결단의 일. 사랑 않겠다는 각오가 어김을 어김없이 만나듯 상륙은 없다. 그렇다면 이 별이 존재에게 준 책무는 사실 어딘가 도달하거나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이다지도 파도를 만드는 일인 것은 아닐까. 많은 날을 다 보내고 또 그 많던 널 보내고, 그제서야 깨달은 것은 내게 당신을 보낼 수 있는 권능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송구와 유출 뒤에 여전히 남을 만큼 내게 당신이 많다는 사실. 그러니 지워질 것뿐 아니라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고 만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어떤 믿음이 생겨날 수밖에요. 영원? 그렇게 감상적인 단어가 세상에 남아있을 리가, 하고 의심했던 자리에 이별로써 못 믿을 것이, 작별로써 다시 믿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렇게나 사랑은 제 갈 길로 갔지만, 영원만은 이 자리에 남아 있어라.

사랑을 고백하는 문장이 ‘너(만)’라는 개별성에서 필연적으로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영원’과 —당신과 나의 마음이 같다거나 우리가 하는 사랑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랑이라는 점에서— ‘보편’의 개념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면, 반대로 이별이란 영원과 보편에 대한 불화 더 나아가 적대의 사건일 테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에 입을 다물어야 했던 것처럼, 그리고 ‘성관계는 없다’는 유능한 철학자의 말처럼, 더는 영원한 것과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재 증명에 이별은 헌신한다. 그러나 이별이 작별로 점철될 때 존재의 감옥을 출소하려 했던 영원과 보편은 다시 종신형을 언도받는다. 작별엔 모든 것이 남는 것은 아니지만, 남아 있는 모든 것이 더없이 존재하고 만다. 사랑에서 무언갈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영원’이란 낱말은, 이제 작별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종사한다. ‘너(만)’이라는 구체具體에서 필연적으로 시작된 사랑은, 이제 ‘너’가 없으므로 오직 추상抽象에서, 보편에서 응고된다. 그 찰나, 작별은 너무 낯설어 사랑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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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작별이 되는 때, 그러니까 영원과 보편이 잠시 숨을 죽였다가 다시 피어나는 사이. 박혜수가 기획한 ⟨헤어질 때 하는 말⟩ 시리즈가 보는 이의 발을 멈추도록 만든다면 그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맨 첫 순간에 『헤어질 때 하는 말』(2021)이 있다. 작가는 ⟨굿바이 투 러브⟩(2013~)를 진행하며 설문 ⟨실연수집⟩을 통해 관객들의 실연 사연과 옛 연인이 남긴 물품을 수집했다. 이후 2021년에 설문 ⟨헤어질 때 하는 말⟩로 이별 시 연인에게 건넨(받은) 말들을 추가로 모았고, 직접 적은 에세이와 임형태가 촬영한 옛 연인의 물품 사진을 더해 책으로 엮었다. 박혜수는 여기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상처받을 마음이 있는가?’/그렇다면… 사랑은 당신의 몫이다.”(11쪽) 덕분에 <어디서 다시 무엇이 되어 만나랴>(2021)를 끌고 갈 마음의 정체를 알았다. 이 작품에는 앞선 말에 응답하듯 “맞아도 혼자보다 나아”라는 글귀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 마음은 기꺼이 자멸을 선택한 마음이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얻은 문장은 분명 그렇게 읽힌다.

박혜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실연수집’ 설문 답변지로 종이학을 접은 뒤 다시 펴서 만든 러브레터를 불도장으로 태움 120×170cm(부분) 2022

영화 속 마츠코에게 사랑은 늘 불행과 한 몸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한평생 사랑을 갈구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폭력에 시달리는 순간에도 “맞아도 혼자보다 나아”라고 되뇌었고, 한 이별이 영원과 보편을 의심케 한대도 그는 이별을 굳이 작별의 형태로 접었다. 혐오스런 마츠코를 결국 미워할 수 없다면 그에게서 우리가 기꺼이 상처받을 마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사랑에는, 물로 그린 그림이 조명 아래서 빛나다가 외려 그 조명의 누적 때문에 사라지듯, 언젠가 사랑의 누적을 말미암아 누군가 떠나리라는 예감이 있고, 그 떠남이 상처가 될 것이라는 이치가 존재한다. 그 이치를 모른 척할 뿐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니 사실 존재가 승인한 것은 상처받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꼭 그에게 받겠다는 결단이었다. 박혜수는 설문 답변지로 종이학을 접은 뒤 다시 피고는 그것을 불도장으로 태웠다. 작별. 사랑하며 살겠다는 말이 —사랑과— 함께 죽겠다는 말로 변하거나 두 말이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시점. 그것들과 마주치는 눈길은 어찌 이리 먹먹한 먹빛이 아닐 수 없다.

예감되고 이치로 쓰인 상처를 기꺼이 선택하는 사랑과 그것이 가능하도록 영원과 보편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작별. 이것이 자학인지 가학인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작업은 그것이 ‘멍의 일’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그런 한에서 작품은 폭력을 망각한 결핍 혹은 중독과는 거리를 둔다. 관계가 얼마나 잔인하고 잔혹한 일인지는 이 거대하게 눌어붙은 재로서의 멍이 이미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하나만 알기에는, 멍은 화면을 모조리 채우지 못한다. 멍은 흔적과 추억 그리고 감정까지 모조리 태울 것처럼 모든 화면에서 일어나지만, 단 하나의 문장만은 태우지 못한(않은) 채 남겨 놓았기에, 아뿔싸 우리는 그 하얀 틈 사이로 잃지 않고 돌아온 영원을 읽게 된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사랑으로 인해 종이가 접히고 펴지는 동안 그리고 이별로 몸 전체를 그을리는 사이, 행간으로서 거기에 처음부터 있었다. 다만 다른 모든 것이 소거되는 동안 지워지지 않음으로써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대치를 작가도 우리도 수습하려 들 수 없다. 오히려 그 상황이 ‘영원’이기만을 바랄 밖에.

목련과 도화가 각각 존재할 때 그것을 두 개로 셈할 수 없는 이유는, 개수가 개별성으로는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목련끼리의 셈과 도화 간의 셈만이 가능하듯 개수는 오로지 동일성만으로 이룩된다. 따라서 박혜수가 모은 실연 속 이별은 몇 개의 이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이별이 몇 개씩이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이별을 계산할 수 없다. 이별을 헤아리는 것은 너와 나의 일이 아니다. 그러니 작가는 이별이 아니라 작별을 말하는 셈이다. 작별의 시점에서 ‘너’라는 개별자를 비로소 잃기로 했을 때, 우리는 작품의 모든 사연이 등을 돌리고 하나의 동일한 문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편이 회귀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신과 나의 마음이 같았다거나 우리가 했던 사랑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통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랑이라는 보편. 그것은 이별에 의해 배면背面으로 향했다. 그러나 비로소 작별을 지을 때, 개별자(너)란 없다는 듯 혼자서 닥칠 모든 고통을 감수하는 것으로써, ‘너’가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사랑만을 받아들이는 추상으로 보편은 정면에 나선다. 이리 물어가며 그렇게도 살아지긴 하는가 내내 물을 테지만,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박혜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실연수집’ 설문 답변지로 종이학을 접은 뒤 다시 펴서 만든 러브레터를 불도장으로 태움 120×170cm(부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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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이 존재에게 준 책무가 묶였다가 풀리는 매듭과 같은 파도를 만드는 일이라면, 이 리듬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가까스로 생을 도모하는 것과 같을 테다. ⟨헤어질 때 하는 말⟩의 표면이 가진 주름과 굴곡들이 때때로 너울 같아 은결이 반짝이는 밤바다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모양만이 아니라 멀리서 달을 경유해 오는 빛과 그리고 마침내 온 수면을 물들이며 떠오를 장래의 빛더미를 담지하는 까닭이다. 그만 저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러다 사라진 그대처럼 함께 무너지고 싶을 때를 무릅쓰고, 그저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살아내겠다고 고통을 작심한 존재에게 늘 ‘아름다움’이란 낱말을 쓰고 싶었다. ‘아름다움’에 패한 저 검은 무늬로 잠시 가엾다가도 오랫동안 사랑스러울 우리. 그 무늬로 박혜수는 헤어짐을 지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하면, 자신들이 아끼는 무언가, 본모습을 보여줄”(158쪽) 순간을 만남도 황홀의 시기도 아닌 실연의 시기에서 찾았다. 나를 고백하고 싶어 나는 이제서야 작별을 하고 있다. 이별이 작별이 될 때.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넣자. 작별을 지어 작품이 될 때. 사랑을 알아 이별을 알게 되었으니, 나 작별을 지어 사랑을 믿게 되었다.

참조
김수영, 「너를 잃고」, 『꽃잎』, 민음사, 2019
박혜수, 『헤어질 때 하는 말』, 갖고싶은책, 2021
신형철, 「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18
심보선, 「이 별의 일」,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1

이 글은 H아트랩 레지던시 결과 보고집에 부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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