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는 기다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세상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다음에’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럼 나는 시계 앞으로 가, 시곗바늘만 빤하게 쳐다보았다. 째깍째깍 뚝뚝 끊어지며 가는 초침보다는 친구 집에서 본 부드럽게 움직이는 초침의 시계가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집에는 그런 시계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시계를 계속 쳐다보면 그는 부끄러워서 다음 시간으로 갈 수 없을 거라고.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나이였고, 누군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평소에 눈감고 하던 것들도 실수했었기에 그가 부드럽게 침들을 옮기지 못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침이 한 바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그가 안심하고 바늘을 옮길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것은 나 같은 이가 또 있구나 하는 유형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부끄럼 많은 그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해야 하는 나를 위해서, 나는 한동안 우리 집에 누구도 초침이 한 바퀴를 도는 직전에는 시계를 보지 못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창세기 1:3이 전하듯 세상은 “하시매”와 “가라사대” 그리고 “칭하시”는 것과 같은 언어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과육이 떨어질 때 유년기의 인류는 나무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을, 그래서 잉여가 될만한 필요 이상의 채집은 하지 않았다는 말을, 나는 그때의 기억 덕분에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명하게 성경의 저 문구를 읽는 이는 그런 인용을 염려하고 마다할지도 모르겠다. 하늘에 닿을 것 같았던 탑은 무너졌고, 조물하는 이가 만든 것은 자연까지니 인간을 소외시키거나 인간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만 있는 기계에 그런 인정을 품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러나 인간이 소외되는 것과 인간이 기계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는 것은, 반대로 기계를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돌아가야 할 본래적인 ‘고향세계’가 기계를 극복한 곳에, 자연에 있다고 전하지만, 사실 우리는 기계와 더불을 때 더 인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이라면 동식물에 말을 거는 것을 저어하지 않는다. 그는 귀촉도에게 허공중에 헤어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양과 장미의 전쟁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기계와 문명 같은 것은 그것들을 침탈해오는 적일 뿐이다. 기계는 말할 수 있는 것들의 목소리를 앗아간다.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닌 것은, 비둘기의 번지가 없어진 것은, 철 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모두 기계들 때문이다. 처음부터 벙어리인 기계들은 자연조차 벙어리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시인들은 기계 앞에서 말을 그친다. 그것은 빼앗긴 말들에 대한 울분일 수 있으며 시조차 말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설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술의 경우라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은 처음부터 말로써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사랑을 ‘말로써 건넸을 때’ 사랑을 잃는 인어공주의 운명처럼, 혹은 말로써 건네는 사랑보다 감각으로 전달될 수 있는 사랑에 헌신하는 인어공주의 희망처럼, 미술은 말보다는 다른 것으로 건네려 한다. 그러니 미술은 운명과 희망을 담아 기계에도 말 아닌 말을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오만한 것이라 하지는 말자, 그는 건네려는 것 앞에서 정직하고 싶은 것뿐이니. 다만 미술이 희망 앞에서 더 절박하다고는 해두자. 그것이 아무리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이미 다른 예술들은 기계라는 것에서 고개를 돌린 지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비추는 작고 오염된 신호에 반짝이는 절박함이라고 해두자. 이는 퇴폐적인 희망이다. 퇴폐적이라 할지라도 그 뒤에 이어서 희망이란 낱말이 붙는다면 작가는 그래도 희망이 아니라고 하긴 어렵다고 사정하며 나선다. 김학량이 북한 잠수함에 “마음이 떠나지 않으니 어떡하랴, 한동안은 쥐켜 살아야지, 도리 없다.”(전시 서문)고 밝히는 것은, 그런 희망을 정말 짧은 순간 보았던 까닭이고 그것에 절박했던 까닭이다. 전시 《바다와 나비》(김학량, 상업화랑, 2019)는 어떤 사정처럼, 그렇게 나선다.
2
기계와 생명체는 얼마나 다를까. 이 상반된 것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이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계가 개체로서 생명체와 유사하거나, 이다지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다. 어떤 것이 생명체일 때, 그것이 생명으로 취급되는 이유는 생을 갖기 때문이다. ‘그’라고 부를 수도 없는, 주체와 대상의 구별도 없이 환경으로 연합되어 있던 것이 상전이相轉移를 통해서 ‘그’로―개체로― ‘발생’한다. 아무것도 구별하지 않던 상평형相平衡의 바다는 특정한 온도와 압력의 조건을 통해서 지구의 첫 개체를 산출해 냈다. 이때 환경과 구분되는 개체는 주체가 되고, 환경은 운반할 수 있는 사물로서 대상이 된다. 대상은 주체에 의해 대상화된 것이 아니라 주체와 ‘동시에’ 동일한 존재적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존재이다. 갈라져 나온 개체는 다른 개체에 들어가 부분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다른 개체를 부분으로 취급하며 진화한 개체가 되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구체화하면서 생산자의 손을 떠나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이것이 생명체가 갖는 생이다. 우리가 어미 되는 자로부터 어쩌다 생겨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듣듯이.
기술적 대상인 기계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상평형의 환경은 특정한 기술의 조건을 통해서 어떤 것을 구별되는 기계로 출현시킨다. 그것은 수단이나 도구로써 사용되기 위해 인공적으로 태어났지만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주체 이후에, 주체에 의해서 대상화된 것이 아니라 주체의 출현과 동시에 대상화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도 기계의 발생에 따라 역시 또 다른 주체로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지상의 존재가 비상의 존재로, 보행의 존재가 주행의 존재로 변화―주체화―하는 것과 같다. 또한 생명체가 생산자로부터 구체화를 통해 자유로워지듯이 기계는 제작자로부터 벗어나 쏘다닐 수 있는 개체성을 함께 띠게 된다. 실린더와 피스톤이 각기 다른 제작자와 계획 아래에서 출현했다가 엔진이 되고, 엔진이 다시 숱하게 분화되었다가 다른 것의 부분이 되는 것은 모두 제작자와 계획을 초과하는 발생이다. 김학량이 잠수함의 “그 숱한 설비・장비는 정교하게 서로 연결되어 제각각 특별한 배역을 맡아서 일한다. 어디서건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전체의 기능을 위협하게 된다.”(전시 서문)고 밝힐 때 이 서술은, 부분들의 상호적 유기작용을 통해 전체를 유지하는 생명(개)체’에 대한 설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기술적 대상은 ‘지금 여기’에 현재하는 물질적 실재가 아니라 생명체와 같이 비결정성과 계보를 지니는 생성적 존재자로서 실존한다.
이렇게, 기계가 곧 생명이 아니더라도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는 실존적 지위는 확인된다. 그러니 우리에게 이런 소식은 가능하다. 전시 《바다와 나비》의 제재가 되는 북한 잠수함은 물속을 다니면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려 하고 있다. 그는 상평형된 상태에서 상전이를 통해 출현한 부분들의 집합인 개체이고, 그런 그가 잠수함이 된 것도 제작자의 의도와 계획을 초과한 것이겠지만 그의 패배는 더욱이 그것을 초과한 것이 된다. 그는 단 한번도 인공물로서 도구의 운명을 호락호락하게 쥐지 않았다. 그러나 잠수함은 다시 한번 발생한다. 전시의 제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나비와 함께 바다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는 것. 이는 초과보다 초월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나섬일 것이다. 우린 그에게 이렇게 말을 걸 수도 있다. 그가 강릉에서 패배를 당했던 것은 바다 알러지가 있는 북한 잠수함이었기 때문이라고.
김학량은 제목과 전시 서문에서 김기림(1908-?)의 「바다와 나비」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시 이전에 쓰인 하나의 시를 더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꿈꾸는 眞珠[진주]여 바다로 가자」(김기림, 『태양의 풍속』. 1931)이다. 시는 “오-, 어린 바다여, 나는 네게로 날아가는 날개를 기르고 있다.”며 끝난다(「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 이 날개는 나비의 날개일 것이기에, 화자는 우리가 이미 확인한 나비가 된다. 그러나 이 시는 「바다와 나비」보다 8년 전에 쓰였지만 「바다와 나비」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비가 “녹슬은 두 마음을 잠그러 가자”(「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고 하며 이미 바다에 다녀온 녹슬음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진주에게 말하고 있다. 이 진주를 시인은 자연 속에서 본 것이겠지만, 김학량은 잠수함에게 진주를 본 것 같다. 강릉에서 사람들은 ‘지금 여기’의 북한 잠수함으로 멈춰진 정물만을 보지만 김학량은 ‘지금 여기’에는 없을 시간을 지나온 근원적 존재인 진주를, 그로부터의 발생을 보고 있다. 그렇기에 나비가 “탄식하는 벙어리의 눈동자여/ 너와 나 바다로 아니 가려니?”(「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라고 물을 때 김학량에게 드러나는 것은, 미술이 운명과 희망을 담아 벙어리로 알려진 기계에도 말 아닌 말을 그치지 않는 태도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다와 나비》라는 제목에 담긴 발생의 상相을 이해할 수 있다. 시 「바다와 나비」는 바다로부터 패퇴한 나비의 이야기지만 전시 《바다와 나비》는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제목은 이전을 이야기하지만 내용은 이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전시의 제목을 지나 작업으로 향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발생’을 말한다. 전시는 이미 생으로 시작한다.
나비는 바다에 “靑[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公主[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김기림, 「바다와 나비」, 『女性』, 1939)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그 시련 이후에 자신과 같이 지쳐서 돌아온 북한 잠수함을 만나 바다로 “녹슬은 두 마음을 잠그러 가자”고 권한다. “너희 행복의 조약돌을 집”기 위함이고, “바다의 인어와 같이 나는 푸른 하늘이 마시고 싶”은 까닭이고, “진주와 나의 귀는 우리들의 꿈의 육지에 부딪치고/ 물결의 속삭임에 기울어”지는 이유에서다(「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 잠수함은 바다에 알러지가 있지만 나 같은 이가 또 있구나 하는 유형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고 꿈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비의 날개가 꼭 젖지 않도록 그를 싣고서 잠수함은 다시 바다를 향한다. 따라서 〈정물〉과 〈그대에게 가는 길〉 등이 목탄만으로 그려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색을 절제한 것이라 판단하면 안 된다. 거기에는 어쩌면 나비가, 잠수함이 볼 수 있는 모든 색이 있다. 목탄에는 이미 모든 색이 있다. 한편 〈정물〉이 바다의 수면을, 〈그대에게 가는 길〉이 수중을 그린 것일 때 두 작품이 표현하는 낙차는 수심을 알려준다. “아무도 그에게 水深[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바다와 나비」) 지쳐서 돌아왔던 나비를 잠수함은 이해하고 있다.
동선 전반부에 목탄으로 그려졌으나 모든 색이 표현된 〈강산무진: 그대에게 가는 길〉은 나비가 보았던 잠수함에게 가는 길이면서 바다인 그대에게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 작업이 표현하는 공간은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 그린 이상향과는 다르게, 자연도 인간도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계가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면 그곳은 ‘강산무진’의 장소가 맞을 것이다. 잠수함에는 강산무진의 모든 것이 있다. 나비는 천정의 원형 파이프에서 강산무진의 구름과 같은 구름을 느낄 것이고, 벽에서는 같은 절벽을, 그곳을 솟아나온 밸브에게서도 송화가루 날리는 같은 나무를 볼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비는 언젠가 이상향인 ‘강산무진’을 갔을 때와 같은 설렘과 기대 그리고 행복감에 젖어있을 것이다.
〈자화상 연작〉은 당연하게도 김학량 스스로를 그린 것이다. 자화상의 표정과 얼굴이 모두 잠수함의 설비・장비로 교체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김학량을 보여준다. 전시 서문에서는 죽음과 관련한 문장이 두 번 나온다. “적의 죽음과 나의 삶이 다를 바가 무엇이랴.”와 “모든 길은 무덤으로 향하지만, 무덤에서 모든 길은 비롯한다.”가 그렇다. 여기서 죽음과 삶, 길이 끝나는 무덤과 길이라는 상반된 이항은 동일하다. 전쟁에 부역하는 북한 잠수함은 그것이 좌초된 순간과 병사들이 그곳을 내린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겠지만, 바다에 순수하게 꿈을 갖는 북한 잠수함의 생은 그 순간 시작되었다. 알러지를 앓지만 강제로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했던 잠수함은 무덤에 도착해 길을 끝내고 말았지만, 무덤에 도착하는 순간 전쟁과 다른 꿈이라면, 나비와 함께라면 알러지를 앓고도 바다에 기꺼이 젖겠다는 길은 시작했다. 생산자나 제작자가 부여한 운명을 가혹하게 따르다가 못내 그 운명의 쓰임에 배제된 자의 생은, 배제와 함께 자유로이 시작한다. 예술가의 얼굴도, 인간의 얼굴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조물하는 이가 부여한 운명을 찾으려 애를 쓰지만 결국 그 운명의 쓰임에서 실패하는 법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자화상 연작〉에 드러난 피부 결은 바다 알러지 때문에 거칠어져 있으면서도, 표정은 자유를 짓고 있다.
〈강산무진―꽃상여〉는 김학량이 그런 홀가분한 표정으로 바라본 잠수함의 내부일 것이다. 나비는 강산무진을 가보았을 테지만, 그는 그렇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잠수함 내부에서 나비가 강산무진을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을 본다. 인간에게는 나비의 색이 절제되어 보이기에, 나비의 감상보다는 김학량의 감상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잠수함의 내부는 노랑, 빨강, 초록 그리고 파랑의 색으로 “그 자체로 황홀한 단청”(전시 서문)을 보인다. 단청은 전쟁에 부역하기 위한 호승심을 일으키는 색이 결코 아닐 테니 애초부터 강산무진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김학량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잠수함 스스로 짓거나, 나비의 귀띔을 참고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김학량도 나비도 그리고 잠수함 스스로까지도 이 기계로부터 패퇴로 인한 죽음을 보기보단, 죽음으로부터 생을 시작하려는 이상향을 보려 한다. 층계를 올라야 보이는, 전시의 마지막 작업인 〈그대에게 가는 길〉은 〈자화상〉과 마주 보고 있다. 전시 초입에 있던 또 다른 〈그대에게 가는 길〉은 나비와 잠수함만의 길이었기에 어둠에 잠겨있지만, 이 자화상은 인간의 눈을 대신하고 있어 조명에 닿은 모습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을 환히 비춘다. 그리고 마침내 나비와 잠수함은 묻는다. 그대는 이제 이 전시가 사정하듯이 잠수함에서 이상향을 볼 수 있을까. 죽음 이후에도, 그래도 희망이라 얄궂게 아우성치는 퇴폐를 그대로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3
인간은 이다지도 외로울까. 그래서 자연은 곁을 물러났으니, 기계라도 사랑해야 한다고,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히려 기계와 문명을 심미화하는 데 종사하는, 인간에 대한 또 다른 거역이 되지 않을까. 사려 깊은 이는 이렇게 물을 테지만 또 그래서 기계와 생명체가 다르지 않다는 사유가 세계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 물음할 테지만, 나는 그 물음에 시계의 초침을 응시했던 나이처럼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다. 고개를 돌리는 까닭은 희망 앞에서 정직하기보다는 절박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이런 유형의 희망은 작은 것이라 인정하기보다, 미약하고 오염된 신호도 희망일 수 있다고 매달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면 금방은 아니더라도 ‘다음에’라는 시간에 언젠가 도착할 수 있었다. 잠수함이 바다 알러지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는 인간은, 잠수함에서 강산무진과 같은 이상향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유는, 잠수함에서 ‘나’ 같은 것을 보는 그림은 잠수함을 결코 전쟁터로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다음 시대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순진했던 이 글은 비웃음을 살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왜 기계와 쉽게 대화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그러니까 왜 벙어리인 것들에 말을 붙이지 않는지 의아했다. 그런 것에 말을 붙이는 것은 철 지나간 서정이라 외면받았지만, 변혁론은 왜 서정으로 급진화돼서는 안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세계의 현재를 합리화하고 심미화하는 서정이 아니라 투쟁하는 서정일 수 있기를 바랐다. 《바다와 나비》의 작업은 그런 믿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앞으로도 떨면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시를 기다렸다. / 조재연
* 참조
-김기림,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 『태양의 풍속』, 1931
-김기림, 「바다와 나비」, 『女性』, 1939
-김재희, 「질베르 시몽동에서 기술과 존재」,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56집』 , 2013
-질베르 시몽동, 김재희 옮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그린비, 2011
이미 끝난 전시이지만 글을 읽으며 회상하고 음미하게되네요.
오늘 상업화랑 요 다음 전시 보러가려는데 재연님 덕분에
더 기대됩니다 🙂 감사해요!
오래있고 싶고, 한동안 아낄 수밖에 없을 전시였던 것 같아요. 저도 전해주신 소식에 더불어 다음 전시를 보러 상업화랑에 다녀와야겠네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 글을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김학량의 전시에 대한 재연님의 글은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기도 했고, 글의 키워드도 이전 글들에서 자주 볼 수 없는 것이라 흥미로운데 여전히 그 속에서 재연님만의 스타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참 매력적이기 때문이에요. 재연님의 글은 늘 예술작품이나 전시의 진리내용을 다루면서도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또 다른, 제 3의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나 고개를 돌리며 ‘다음에’라는 시간에 다다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정직하게 마주하며 작은 희망도, 미약하고 오염된 신호도 모아모아 ‘다음’을 만들어가는 삶은 어떨까요? “오-, 어린 바다여, 나는 네게로 날아가는 날개를 기르고 있다”에서 처럼, 날개를 기르며 다음에 다다를 것을 준비하는 삶이요.
(전시 포스터 설명문에 ‘상업화랑’이 아니라 ‘사업화랑’으로 오타 있어요.)
안녕하세요. 몇 번이나 읽어주셨다는 말씀은 꽤 뜨거워지게 하는 말씀이셔요. 전시가 없었더라면 한 발자욱도 갈 수 없었던 말들이, 움츠리지 않고 나올 수 있었어요. 비평도 하나의 작업이,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늘 하던 고민인데 그런 말을 안겨주시니 감사하고 안심이 됩니다. 고개를 돌리는 건 어느 순간 알게 되어버린 결말에 대한 부정이거나 혹은 다음으로 도착하지 않아도 만족한 것에서 멈추고 싶은 마음일 거라는 생각을 요즈음엔 하고 있어요. 주신 글이 용기가 되어 ‘다음’을 만들어가는 삶을 지나고 싶은 욕심도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큰 오타를 지적해주시어 고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감사드립니다.)
재연님이 고개를 돌리는 것이, 기다리는 다음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할, 나아갈 힘이 있을거란 것을 그간의 재연님의 글애서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재연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글을 통해 당신에 대해 전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요. 고개를 돌리든 마주하든 중요한 건 본인의 감정이나 속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외면하고 숨기지 않는 것일테죠. 괜히 말이 길어져서 미안해요. 늘 응원하고,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
오랜동안 알아 온 벗이 해주는 말처럼 정확한 말씀이어서 퍽 기뻐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노력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