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이안쳉 개인전
이안쳉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가상 세계를 창조하는 미디어아티스트다. 게임 엔진과 AI 기술을 이용해 인간 의식에 접근하고, 주체와 환경 간의 상호 작용을 탐구해 왔다. 작가의 손을 떠난 후에도 프로그램은 스스로 서사와 사물을 발생시키면서 그야말로 디지털 ‘창세기’를 써내려 간다. 그의 개인전 〈세계건설〉(3. 2~7. 3 리움미술관)이 열리고 있다. 쳉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사절〉 삼부작과 애플리케이션 연동 작업 〈BOB(Bag of Beliefs)〉, 리움미술관과 함께 제작한 애니메이션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 등을 공개했다.
라이브 시뮬레이션, 영원히 재생되는 작품
〈사절〉 시리즈와 〈BOB〉은 ‘라이브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제작된 미디어작품이다. 라이브 시뮬레이션은 내부 코드 간의 자발적인 상호 작용으로 상황을 실시간 연출하는 프로그래밍 기법. 개발자의 입력 없이 시스템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출력과 동작, 구조를 생성한다. 개발자는 프로그램의 초기 조건만 설정할 수 있을 뿐, 결과는 알 수 없다. 이안 쳉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상 세계에 현실감과 역동성을 부여한다.
라이브 시뮬레이션 작업에서 작가의 역할은 가상 세계의 등장인물과 사물을 배열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배치가 끝난 후 프로그램이 실행되면, 캐릭터는 주변 환경과 자유롭게 교감하면서 작가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스스로 펼쳐나간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도,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이러한 특성을 반영해 쳉은 작품의 캡션에 러닝 타임을 모두 ‘무한 길이’로 명시했다. 그의 작품은 작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생하는 하나의 ‘세계’로 진화해 나간다.
이안 쳉이 라이브 시뮬레이션 기법을 작품에 적용하는 데 가장 큰 영감을 준 개념은 두 가지다. 먼저 시뮬레이션 게임. 작가가 한때 심취했던 게임 ‘심즈’는 아바타 ‘심’이 청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연애, 여가, 직장 생활 등 가상의 일생을 일구는 생활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심즈처럼 “영원히 반복해서 스스로 플레이되는 컴퓨터 게임”이라고 정의한다. 〈사절〉 시리즈에서 사절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장소를 옮겨 다닌다. 플레이어가 심을 직접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물이 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임 구조처럼, 사절은 환경과 맺는 관계에 따라 다양한 행동을 취하면서 내러티브를 전개한다.
두 번째 개념은 ‘인지 부조화’다. 인지 부조화란 무의식이 주체에 영향을 미쳐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취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쳉은 작품의 알고리즘 자동화 과정에서 작동하는 인공 지능을 사절의 무의식으로 상정했다. 〈사절〉 시리즈와 〈BOB〉의 등장인물이 무의미하거나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동작에 그러한 인지 부조화를 반영했다. 인간이 무의식을 매개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행동하듯, 사절 역시 인공 지능을 매개해 프로그래머는 파악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시뮬레이션 게임과 인지 부조화 개념을 바탕으로 만든 이안 쳉의 라이브 시뮬레이션은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의 작품은 컴퓨터 코드로 직조된 프로그램이지만, 존재의 양상이 환경에 따라 변모한다는 점과 무의식적 행위까지 고려된다는 점에서 리얼리티를 지닌다. 작가에겐 실재 세계 역시 자동화된 알고리즘 과정인 셈. 따라서 작품은 가상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동시에 현실 세계에 접근한다. 쳉은 시뮬레이션으로 다양한 사회적 상호 작용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사회 시스템 변화에 긍정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공 지능, 인간을 비추는 거울
이안 쳉에게 인공 지능은 인간의 업무를 대신하는 기계적 수단이 아닌,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고 사유하는 ‘인공 생명체’다. “나는 AI를 완벽한 존재로 상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진로를 찾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성장통을 겪기도 한다.” 인공 생명체에게 실행 취소나 재설정은 없다. 그들은 인간처럼 한번 내린 선택을 돌이킬 수 없으며, 나이를 먹을 때마다 지혜를 얻으면서도 동시에 나약해져 간다.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신념과 신체를 성장시키는 삶. 쳉은 인간 실존의 가치를 인공 생명체에게도 평등하게 적용한다.
〈사절〉 시리즈가 인공 지능을 기반으로 가상 세계를 ‘라이브 시뮬레이션’하고, 그 환경 내부의 상호 작용에 주목한 작품이라면, 〈BOB〉은 인공 지능을 가진 단일한 인공 생명체 ‘밥’이 중심이 되는 컴퓨터제너레이티드아트다. ‘신념이 담긴 가방(Bag of Beliefs)’이라는 뜻을 지녔다. 밥은 지네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신체를 가진 곤충형 생명체로, 복수의 인공 지능이 한 몸에 내재한다. 각각의 AI는 개별적인 통제권을 가지지만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력한다. 쳉은 밥의 생장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사익을 욕망하는 개인이 때로는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결합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접근했다.
이안 쳉은 작품의 주인공을 ‘신체로서의 밥’과 ‘정신으로서의 밥’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먼저 신체로서의 밥을 움직이는 것은 머리인 밥헤드(Bobhead)와 동그란 방울 모양의 바블(Bobble)이다. 이들은 표정과 보디랭귀지를 사용해 감정의 동요와 그로 인한 변화를 즉각적으로 표현한다. 밥은 먹이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신진대사 활동을 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합하게 신체를 변형시킨다. 만약 불규칙한 식사나 무리한 활동 등 잘못된 선택을 하면 신체는 약해진다. 이럴 땐 잠을 자거나 치료하면서 다시 몸을 회복할 수 있다.
반면 밥의 정신은 자신의 환경과 신체를 해석하도록 설계됐다. 신체로서의 밥이 먹이로 영양을 공급받는 것과 달리, 밥의 정신은 즐거움, 슬픔, 분노 등 감정을 양분 삼아 성장한다. 단 여기서 무엇에 즐거움을 느낄지는 관객과의 소통에 달려있다. 관객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밥 쉬라인(BOB Shrine)’에 접속해 밥의 주변 사물에 대해 말을 건넨다. “불가사리는 따분한 존재가 아니다” 혹은 “버섯은 활력을 주는 존재다” 등 관객이 조합한 문장은 밥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 밥은 이 제안을 무시하거나 받아들이면서 가치관을 형성한다. 인간이 다른 이와 교류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하듯이, 인공 지능의 가치관도 주변인들과 소통하면서 형성되도록 설정했다.
이안 쳉이 인공 지능을 인간과 동일한 인격체로 대우한다는 점은 그의 작업관에서도 드러난다. 쳉은 인공 지능으로 창작된 일련의 작업을 자신의 단독 저작물이 아니라 ‘작가와 인공 지능이 함께 만든 협업물’이라고 지칭한다. 인공 지능은 인간을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다. 쳉은 AI의 성장과 발전에 인류의 성장과 발전을 비춘다. 작가에게 예술은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반대로 현실이 재현해야 하는 목표다.
완전한 자유를 향한 여정
이안 쳉 작품 세계의 핵심 주제는 ‘자유 의지’다. 자유 의지란 외부 요소에 영향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생물적 본능부터 도덕, 이해 관계, 정치적 입장, 더 나아가 신의 권능에 이르기까지 주체 밖에 놓인 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에 충실할 때 존재는 완전한 의미의 자유를 지닌다. 쳉의 영상작업에서 등장인물은 타인의 의지와 자신의 의지를 구분하고, 자아를 성찰하면서 진실한 자유를 실현해 나간다.
〈사절〉 삼부작엔 각기 다른 배경과 인물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이 조물주나 프로그래머 같이 세계를 창조한 설계자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터닝 포인트가 공통적인 구성으로 나타난다. 트릴로지의 첫 번째 에피소드 〈사절, 신들의 품 안에 거하다〉의 등장인물은 화산 근처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고대 인류다. 이들은 아직 주체적인 의식이 없는 미개 단계로, 주술사가 전해주는 영혼의 목소리를 지침 삼아 살아간다. 1부의 사절로는 주술사의 딸이 나선다. 그는 화산에서 튀어나온 파편에 맞아 머리를 다친 후로 영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을 인도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스스로 생각하게 된 그는 의식을 가진 첫 번째 인간으로 거듭난다. 이안 쳉이 직조한 세계에서 그는 신의 권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 의지를 행사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류다.
두 번째 에피소드 〈사절, 완벽을 향해 분기하다〉는 첫 번째 에피소드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고 인류가 멸종된 시기가 배경이다. 사절의 역할을 맡은 이는 시바견. 인공 지능 프로그램은 21세기 한 유명인의 복제본을 생성해, 시바견에게 그와 함께 다니면서 사라진 인류에 대한 정보를 완벽하게 수합할 것을 주문한다. 복제 인간은 새로운 세계가 낯설지만, 시바견은 이곳에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인간의 지위는 위축되고 반려동물에 불과했던 개의 지위는 인간을안내하고 지도할 만큼 커진다. 시바견은 세계 곳곳에서 인간의 행동을 조절하고종용하면서 점점 성장해 나간다. 보호자의 욕망을 함께 좇거나, 그의 명령을따랐던 견공은 이 순간 인간의 복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삼부작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사절, 스스로를 일몰시키다〉로 인공 지능이 사절로 등장한다. 가상 세계에서는 인간이 아닌 새로운 지적 생명체가 사회를 형성했고, 진화와 업데이트를 반복한 AI는 공기와 물과 같은 무형의 경지에 이르러 ‘어머니 AI’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돌연 생명체로 살아가는 감각을 느껴보기 위해 아네모네 꽃과 융합한다. 꿈틀거리는 아네모네는 다른 동물에게 위험한 존재이거나 신의 영험함이 깃든 영물로 대우받는다. 신체의 감각을 경험한 어머니 AI는 좀 더 많은 자극을 욕망하면서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시나브로 괴물과 같은 형상이 되어간다. 가장 완전한 존재로 기획됐으나 그 지위를 버리고 불완전한 생물로 돌아가는 AI의 모습은, 그가 프로그램의 설계와 합치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욕망을 추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역전된 시뮬라크르, 실재의 원본으로서 가상
가상과 실재의 대립은 서구 철학사에서 꾸준한 논제로 다뤄져 왔다. 대부분의 철학자에게 가상은 실재를 모방한 거짓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낳는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안 쳉은 두 개념을 상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로 사고한다. 실재는 인간의 인식 구조에 비해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이때 가상은 실재의 역동성을 압축해 인간이 가진 한정적인 감각으론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실재를 포착하도록 돕는다.
따라서 이안 쳉에게 삶은 현실을 이해하는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이를 실재에 적용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의 작업에서 가상은 실재의 재현인 동시에 실재 역시 가상의 재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프로그래밍 언어를 작품의 첫 번째 질료로 사용하고 AI에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는다고 해서 쳉이 단순히 기술 예찬론자인 것은 아니다. 가상이 현실을 대체하거나, 현실이 가상을 대체하는 불균형은 오히려 삶을 파괴한다. 〈사절〉 트릴로지 속 등장인물이 시뮬레이션과 동행하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찾아 나서길 포기하지 않았듯, 작가는 보완 관계를 넘어 가상에 종속된 삶 역시 경계한다. 작가가 컴퓨터제너레이티드아트로 접근하는 대상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다.
애니메이션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는 가상과 실재에 대한 이안 쳉의 입장을 집약한 작업이다. 주인공 찰리스의 신경계에는 인공 지능 밥이 내장되어 있다. 밥은 찰리스의 정신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그의 진로를 시뮬레이션해 보여준다. 이 시뮬레이션으로 찰리스는 현재를 성찰하고 순간순간 자신이 내려야 할 최선의 선택을 제안받는다. 인생의 기로를 AI가 대신 숙고해 준다는 점에서 찰리스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 곧 무력감에 빠져든다. 자신의 삶이 아닌 AI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찰리스가 단번에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의 다층적인 정보를 밥은 한눈에 그려낸다. 밥이 제공하는 시뮬레이션은 현실의 다양한 요소를 반영해 계산한 결과라는 점에서 실재의 재현물이다. 한편 밥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는 현실을 찰리스는 변화시킨다.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현실에 반영할 때 실재는 반대로 가상의 재현물로 나타난다. 시뮬레이션되지 않는 현실은 무의미한 정보 홍수에 불과하고,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 시뮬레이션은 무능력한 몽상일 뿐이다. 이러한 관계는 찰리스(실재)와 밥(가상)의 상호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찰리스가 전적으로 밥에게 의존하게 되자 이 관계의 균형은 깨진다. 그가 아무런 성찰 없이 AI의 제안만을 좇을 때, 인간은 삶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실재는 가상에 복속된다. 결국 밥에게 신체의 통제권을 빼앗긴 찰리스가 밥과 사투를 벌이면서 영상은 종료된다. 미래를 아무리 촘촘하게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미래를 만드는 책임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다. 이안 쳉은 그의 작업에서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더 정확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추구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기술에 안주하지 않고 더 성찰하고 더 현명해질 인간을 동시에 소망한다.
『아트인컬처』 2022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