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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는 한때 우리 것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금지된 환상을 다시 한번 ‘지금 여기’에 불러낸다. 잊히거나 놓쳐버린, 잠들었던 것들이 실재의 틈을 비집고 돌아온다. 투명한 현실은 이 순간 가장 흐릿하다. 꿈이, 마법이, 운명이 눈을 떴기 때문이다. 미술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단절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삶 어딘가에서 늘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는 채로 잃어버린다. 미술이 하는 일은 일상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미술의 형안으로만 겨우 보이는 그 분실을, 도로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었거나, 있거나, 있게 될 미지未知의 발견. 그러나 그들은 이제 내게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미생未生의 발견. 두 발견으로 삶은 불편해진다. 유용하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그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일부)를 상실했다는 예감이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미술에서 ‘사건’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김지우의 회화는 더 지독해서, 그 잃어버린 것들이 여전히 화면이 아닌 우리에게 존재한다고 속삭인다. 돌이킬 수 없다면 기꺼이 체념할 텐데 그가 남겨놓은 희망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사라진 것을 되돌리는 것은 미술이 아니다. 그것을 다시 볼 수 있는 눈. 작가는 그 시선의 가능성을 비춘다.
환상을 다시 세우는 일은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일이고, 기존의 세계와 싸우는 일이다. 인과의 세계에서 기적을 확신하는 위반자로 다시 태어나서면서도, 이를 논리와 질서로 억압해 온 기왕의 현실과 투쟁해야 한다. 김지우의 회화가 그렇다. 그의 회화는 은밀한 창조와 장렬한 사투로 분분하다. 개인전 〈히로인의 계보학〉(3. 17~4. 5 어울아트센터 갤러리명봉)에서 김지우는 1990년대 대중문화에서 등장하던 ‘마법 소녀’를 전면에 내세웠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다 악이 움직이는 순간 요술봉을 들고 등장하는 여성 영웅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작가가 그 소녀들을 떠올린 장면이다. “12월, 우리는 광장에서 응원봉을 아주 높이 들었다. 우리가 사랑했던 문화는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었다.” 지극히 환상적인 무대와 도무지 현실적인 현장. 김지우는 지난 겨울, 상반된 두 영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광장에 선 사람들, 그러니까 평범한 얼굴을 하고 학교나 일터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마법 소녀처럼 일상과는 단절된 모습으로 광장에 존재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들은 ‘마법’을 요구했다. 마법이 통하는 세계를 창설하고자 싸웠다. 정책이 바뀌는 현실 정치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폭력과 참사, 가난, 억압, 부조리…, 그 어떤 비극도 불가능한 세계를 통째로 내놓으라는 ‘프로파간다’였다. 이런 일이 어떻게 마법이 아닐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떻게 마법을 믿지 않고 나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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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초월적인 버팀목과 작별하고 논리와 질서를 택할 때, 근대인이 치러야만 했던 대가는 바로 ‘의미’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희미해져 간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인생 그 자체와 싸우며 지낸다. 자명한 악과 싸우는 로망스적 영웅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 이후 위대한 장편이 시간과 의미라는 두 축 위에 구축된 것도, 그 속의 주인공이 그저 삶의 무의미 따위와 대결하는 신경증적 존재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 초월적인 버팀목을, 그러니까 환상을 다시 이 세계로 가져오는 일은 ‘의미’를 되찾는 투쟁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떻게 되찾아지는가. 근대인을 영웅으로 즉 마법 소녀로 만드는 것은 물론 가능성이 아닌 불가능성이다. 가능한 차선이 아니라 패배가 뻔한 싸움에 대한 가망 없는 헌신. 불가능성은 의미가 무의미란 싸움에서 승리하여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에서만 겨우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입증한다. 다시 말해서, 삶의 의미는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 가까스로 드러난다. 그러니 환상은 불가능성에 대한 은유다. 불가능한 세계는 가능하다고 외치는 투사와 마법을 펼칠 주문을 외치는 소녀는 이 순간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말을 김지우가 현실의 풍경을 초현실적 장면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작가의 그림 어디에도 기적은 현현하지 않는다. 환상은 화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법에 눈을 뜨는 것은 그와 마주한 ‘우리’다. 김지우 회화가 지닌 힘은 여기에 있다. 〈소녀의 계보학〉(2025) 연작에서 등장하는 요술봉과 마법 소녀 캐릭터는 상상의 구현이 아니라 원작을 모티프 삼은 장난감의 재현이다. 김지우는 “애니메이션 속 히로인이 악당과 싸우는 모습을 통해 ‘싸우는 소녀’라는 원형을 인식”했고, 그것은 “이상화된 아이돌”을 거쳐 “소비 대상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어 응원봉을 든 우리가 탄생했다고 적었다. 시장과 결탁한 현실이 의도한 것은 정해진 코드와 서사에 따라 소진되는 상품성이었을지 모른다. 또 논리와 결탁한 현실이 의도한 것 역시 마법이란 오로지 액정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규칙이었을 테다. 그러나 기획은 어긋났다. 환상이란 거짓임을 안 이후에도 우리는 그림으로 돌아온 그들에게서 기적을 발견해 낸다. 빛이 바래고 색이 사라진 불투명한 ‘풍화’의 표현은 옛 사물의 나약함이 아니라, 그 바램과 소멸 속에서도 살아남은 ‘환상’에 대한 암시다. 모든 것이 자본으로 관리되고 디지털화된 세계에선 단지 죽은 것만이 선명하다. 불투명하다면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김지우의 회화는 지금의 세계와 다투기 위한 것. 그러나 그 무기가 이념이나 이론이 아닌 개인의 기억으로 충분한 것일까. 다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념은 완전하지 않고, 이론은 현실이 아닌 공중에 머문다. 투쟁이 가장 진실한 순간은 그것이 텍스트로 무장될 때가 아니라 개인의 삶에 밀착해 있을 때다. 우리는 개인의 비극 어디에서도 그 비극을 만든 ‘세계’라는 배후를 찾아낼 수 있다. 1873년에 아르튀르 랭보가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 1」)라고 쓰면서 이성애만을 사랑으로 규정하는 세계를 바꿔야 한다고 제시한 것처럼, 또 전후의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사양』)라고 적으면서 비도덕적인 사랑을 완성하고자 그것에 손가락질하는 세계를 뒤집으려고 했던 것처럼, 그리고 마법 소녀가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처럼…. 그러니 〈Enchanted Propaganda 2〉(2023)와 〈Enchanted Propaganda 3〉(2023)에 사용된 프로파간다가 사랑의 이미지인 것은 필연적이다. <Enchanted Propaganda 1>(2023)에 새겨진 구분되지 않는 얼굴들. 낯의 부재는 지워진 것이 아니라 열려있는 것이다. 그 위로 광장에서 응원봉을 들었던 손이, 마법 소녀의 주문을 따라 외쳤던 목소리가, 그러니까 어디에나 있는 개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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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가 앞서 천착한 대상은 ‘노래방’이었다. 작가가 탐구해 온 메타모르포제metamorphose(변신)의 개념을 염두에 놓는다면, 노래방은 일상에서는 감히 보여줄 수 없는 ‘나’를 보여주는 변화의 공간이고, 개인의 목소리가 공동체의 배경음으로 전유되는 확장의 처소다. 작가가 이번 개인전에서 세계와 싸우기 위한 환상을 데려올 때 노래방은 광장과 고스란히 연결된다. 지난 전시에서 발표했던 〈소선동산〉(2023)에서 대구의 소선이 아니라 이소선이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함께 흘린 눈물의 무게를 헤아리는 〈사랑의 무게를 재는 방법〉(2023)의 노란빛이 재난의 바다를 향해 간다면 그것은 이번 개인전이 지닌 가치일 테다. 그리고 진정한 힘은 저 빛바랜 것을 보고 환상을 기어코 찾아내는, 마법 소녀가 될 준비를 마친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궁터가 광장으로 바뀌고, 노래방 마이크가 선전의 나팔이 되고, 마법 소녀는 투사로 나서고 그렇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혁명가로 부르는 일…. 히로인의 계보란 그렇게 이어지는 것 아닐까. 김지우 회화 이후 우리 삶은 불편해지는 것을 넘어 위협적이게 된다. 작가의 세계는 그런 점에서 지독하다. 이제 우린 정체를 숨기고 또 드러내면서 암약해야만 한다. 도처의 악이 있다. 자 변신이다. 문 크리스털 파워!
참조
서동진,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북스, 2014, pp.187~216.
신형철, 「시적 시민성의 범주론」, 『창작과비평』 제49권 제1호, 창비, 2021, pp.341~365.
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옮김), 『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화, 2014.
제임스 설터, (박상미 옮김), 『가벼운 나날』, 마음산책, 2013, 추천사(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