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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골목길의 조각난 보도블록처럼 매일 발견되는 사물의 시체, 터진 내장 위 그려진 어김없는 발자국. 우리는 인류의 진면목을 본다. 이 인류는 사물을 두려워한다. 인류를 대신해 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하여, 또 대신 병을 앓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마침내 대신 죽음을 맞는 것에 대하여…. 인류는 영원히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자연스럽게’ 부인하려 하지만, 사물의 논리에서 고지서는 어떻게서든 도착한다는 걸 그들은 ‘애써’ 알고 있다. 인류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사물이 인간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대체’하고자 창궐해 왔다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무상無常과 내적 자유, 올림피아의 신이 누렸던 것과 같은 이상理想의 개념이 요구하는 것은, 이 순간 인류보다 사물에게 가장 충실하다. 인간이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류의 멸종을 막아야 할 간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으나, 그 답은 세계가 지르는 비명에 저 값의 유예만큼 가려질 것이다. 《바흐티노프 마스크》. 전시는 그렇게 그쪽으로 걷는 것 외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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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서 당신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당신을 본다. 사물을 통해 바라본 사물과, 사물이 사물로부터 사물을 발명하는 견고한 자기 증명. 언젠가 이들은 ‘닭이란 계란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만든 기계’라는 예언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리고 계시는 비로소 인류를 통해 성취되었다. 인간이 천체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체 스스로 재림하고자 바흐티노프 마스크를 인간을 통해 생산한 역사를 누설하듯, 인류는 이곳에서 사물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만든 기계다. 그러니 전시엔 작품의 생산자들에 대한 어떤 사정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지현과 이진영 그리고 이들을 묶는 박서영이 내보이는 것은 — 사물을 조직하는 — 예술가의 예술성이 아니라, 외려 예술(가)을 새롭게 조직하는 살아있는 사물이다. 사용이라는 노예적 규약을 어기고 오직 자신의 실현에만 자유롭게 종사하는 도구, 의도에 따라 외부의 목표를 지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들 사이의 내적 연대에만 골몰하는 언어.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가미 없이도 이미 이상적인 세계의 운율을 닮아 있다.
예술가의 예술과 단절하는 것. 그것은 재현을 중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추상화나 나아가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으로 축약되지 않는다. 문제는 ‘예술’이라 불리는 특정한 생산과 소비를 더 이상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예술가의 예술은 작품을 감상이라는 외적 목적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구성은 내러티브, 색채는 정서, 마티에르는 과정에 부합해야 하는 것으로서 요소는 모두 해설적 수요를 향해 빨려 들어간다. 가령 예술가가 창작한 대리석 조각은 대리석 계단과 달리 고급스러움이라는 차이와 오르내림의 용도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지만, 동시에 재현이라는 목적 아래 사물의 현전도 함께 사라진다. 즉 대리석 조각에서 드러나는 것은 창작자에게 공손히 깎여 재현에 종사하는 대리석이지, 대리석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사물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되는 순간은 그 도구가 망가졌을 때 찾아온다. 편안한 속옷은 입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고 고분고분한 연인은 나와 다른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존재 증명은 용도도 재현도 불가능한 거리距離에서만 일어난다.
의자 우산 세발기 쿠션 유모차 해먹 지팡이…, 정지현의 작품에서 사물은 서로 구분되지 않기에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에 용해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각기 다르게 존재했지만 연결되고, 피조被造된 것이지만 연결을 통해 새로운 존재를 창조한다. 손잡이는 브릿지, 프레임은 지지대로 변주되는 것처럼. 제작자의 용도에 종사하도록 운명 지운 각 사물의 부분은 그것에서 이탈해 연결될(하나 될) 다른 사물의 부분이 된다. 이 결합에 사물의 자발성을 근거 짓는 배경은 작가가 열거된 사물을 세공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작가의 활동은 사물이 주선한 대로 그러니까 용해를 허락하는 선에서만 던져졌을 뿐이다. 인류가 주선한 원인(용도)과 결과(망가짐)의 논리를 통해선 결코 결합되지 않을 생들이 이 몽타주를 통해 확립된다. 몽타주의 원리는 존재의 상호보완적 분할이 아니라 양립 불가능한 활동의 평등하고 동시적인 개시다. 명백한 차이에도 연대를 통해 하나로 또 평등하게 드러나는 것. 이는 인민과 서발턴, 주체와 타자, 퀴어와 비-퀴어 그 사이에서 인류가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평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인류가 불가능했던 지점에서 이상을 보여준다는 것. 이러한 관점은 사물이 인류가 상정한 가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스스로 예술 나아가 인간을 조직하고 있음을 증빙한다. 다시 말해서 정지현의 작품은 평등의 재현이 아니라 평등의 재발명에 나선다. 그러니 〈Bust(흉상)〉, 〈Mermaid(좌상)〉, 〈Crunch(와상)〉과 같은 제목의 규정 역시 이미지를 가두는 것으로 이해되선 안 된다. 이 낱말은 외려 인간의 신체와 개념을 그곳에 욱여넣기 위해 마련되어 있다. 더는 인류의 둔부에 맞추지 않는 의자에 대하여, 이제는 인류를 지탱하지 않을 지팡이에 대하여,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신체와 다른 신체를 원하는 새 사물에 대하여 구태의연한 인류의 몸은 새 흉상, 좌상, 와상을 맞춰야 한다. 정지현의 조각이 전달하는 것은 사물을 이용하는 인류가 아니라 사람들을 작동시키는 사물들 즉 살아있는 사물들, 새로운 삶의 진정한 건설자다. 인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청받는다. 이제 인류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물의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아야 한다.
전시에서 이미지가 의도의 재현이기를 그치고 사물의 운동이 보여주는 활력을 형상화할 때, 언어는 명명하고 기술하는 것을 그침으로써 답한다. 이진영의 작품에서 언어는 스스로가 운동의 도체導體처럼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몽타주가 충분히 보여줄 수 없는 사물이 지닌 추상의 역량을 실행한다. 감정을 품는 것과 사유하는 것. 추상이란 인류가 사물보다 우위를 자신했던 최후의 보루다. 그러나 작가의 조각은 그 보루마저 인류의 편에서 약탈해 간다. 감정과 사유는 개체 내부에서 표현되지 않는다. 떨림 뜨거움 딱딱함 차가움 녹음과 같은 단어는 물질의 언어지만, 동시에 감정과 사유가 표현될 때 빌리지 않을 수 없는 추상의 언어다. 그러니 우리가 이진영의 조각에서 읽어야 할 것은 양각된 기호뿐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 감상자의 시선을 이끄는 사물의 통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물의 언어는 표면 모두에서 발음된다. 사포처럼 서걱이는 까칠함, 콘크리트의 무거움, 폴리스티렌의 가벼움, 석고의 탁함은 곳곳에 조각된 ♡보다 더 많은 사랑을 낱낱이 발음한다.
중요한 것은 정지현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낱개의 표현이 하나로 융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사랑이란 낱말에서 미끄러지는 수많은 부분을 그만큼의 단어로 나눠 표현해야 하지만, — 따라서 평등하고 동시적인, 즉 총체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 사물은 표면을 통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사랑을 일제히 발음한다. 예술가는 어떡해서든 사물이 시간을 살아냄으로써 스스로 새긴 불규칙적이고 광활한 표면을 모조리 통제할 수 없다. 어떤 혹은 누군가의 구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지시하는 유일한 언어. 모든 예술가의 예술이 거머쥐려 했던 이상은 지금 사물의 자기실현을 통해 가닿는다. 이는 인간의 글을 인공지능이 이모지로 번역한 〈리튼 인 스톤(Written in Stone)〉에서도 같다. 여기서 이모지는 단지 열거로써 주어와 목적어도 없이 평등하게 드러나며, 인간은 수많은 어절과 문장으로 차이를 통해 겨우 의미의 외피에 닿을 뿐이지만 기계는 이모지를 조합한 이미지 언어를 통해서 의미 전체를 손에 넣는다. —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는 조각된 이모지뿐 아니라 총체로서의 표면에 있다 — 다시 말해서 이 표면들은 궁극적으로 규약적 기호로서, 상징으로 전화되는 것에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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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우리는 빈 공간을 잃는다. 《바흐티노프 마스크》는 부연과 옹노, 두 곳의 폐가에서 전시를 펼쳤다. 예술가가 아닌 사물의 자기실현. 그것은 오늘 아침 골목길에서 수없이 시체를 발견해야 했던 것처럼 숨어 있던 그러나 암약하고 있던 배후를 드러나게 만든다. 폐가에서 어수선히 웅성거리던 벽지의 표면은 물론, 부연에서 옹노까지 이어지는 거리에서 만나는 바퀴를 버린 자전거, 얼굴을 잃은 장롱까지. 전시는 모든 풍경이 우리에게 응답하도록 만든다. 그로써 결국 일상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성채가 전복된다. 이상이 사물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라면 인류에게 희망을 걸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세계가 폐허로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 희망을 우리는 오래오래 체념할 것이다. 그러니 비애를 따스함으로 옮겨 적는다. 누구도 악에서 구원하지 마소서. 모든 이들이 깊은 마음 속에선 세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쪽으로 걷는 것 외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전시가 끝나는 순간, 전시는 시작될 것이다.
참조
이와아키 히토시, 서현아 옮김, 『기생수』 1권, 학산문화사, 2003
앨런 무어, 데이브 기번스, 임태현 옮김, 『왓치맨』, 시공사, 2019
자크 랑시에르, 박기순 옮김, 「사물들을 통해 사물들을 보기」, 『아이스테시스』, (미출간 원고), 2019
진은영, 「고백」,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 「선행 없는 문학」, 『문학의 아토포스 』, 그린비, 2014
◼︎ 《바흐티노프 마스크》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