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상의 형이상학_고현정: The Sweet Sunburn

고현정, ⟪The Sweet Sunburn⟫, 아트랩반, 2022. 4. 22~5. 21, 전시 포스터(디자인: 마카다미아오!)

당신의 말을 잘 듣는 나는 비로소 여름을 당신에게 보낸다. 당신은 당신의 생이 싫다고 했지. 그러니까 내가 그 생을 망가뜨려 줄까. 그가 소리를 지르고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당신의 속이 풀리어 해어질 때까지. 그러다가 결국은 그를 연민하고 말 때까지 생이 저물게 만들어 줄까. 어린 숨결에도 시들고, 젖은 안개에도 불이 붙고, 거위의 깃으로도 곪을 만큼 생을 흐물게 녹이어 줄까. 바다를 증명하려는 조개의 화석처럼, 초생달을 고백하고 마는 고래의 맥놀이처럼, 백 개의 그림자를 알리는 밀의 줄기처럼 굳어지지 않는 것들로 모두 모두어 이곳을 채워줄까. 너에게 아침은 어떻게 오지라고 묻지 않고, 처음으로 밤을 기다릴 당신. 다디단 살 그을음. 아이의 웃는 얼굴엔 희망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수순에 따르면, 미소 동안 경직된 입가는 이내 힘이 기울어 절망을 기다리는 표정이 된다. 무표정엔 미소로 가는 길이 있지만, 미소엔 다시 미소로 갈 여정이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니 나, 도리어 웃는 얼굴마다 비애를 읽고 있다. 하이얀 빗금만큼 빛이 사그라질 것도, 겨우 밤을 머금은 물 역시 번지고 비뚤어져 공백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도, 붓은 시작한 적도 없이 어딘가 도리 없이 도착하고 말았다는 것도 빠짐없이 발설하는 저 자욱 때문에 미소가 도달할 장소를 전부 들켜버리고 만다. 하여 아무리 당신이 웃어도 생을 망가뜨리는 일은 그만두지 않아야지. 도무지 나뭇결을 잇는대도 기절한 새와 손은 서로가 불편하다는 사실쯤은 나는 알고 있다. 여름에 가장 큰 천체처럼 스스로 열을 내는 손바닥이 비록 상냥함을 담았다 하더라도, 거칠고 온도도 없는 나무갗보다 새를 실망시킬 테고, 눈을 뜨지 않는 동안에만 머물고 눈을 뜨면 이름을 부르기 전에 사라질 새는 손을 기어코 서운케 할 것이다. 산갈치는 바란 적 없이 노도에 이끌려 뭍에 올라와 꿈뻑 꿈뻑 너를 노려 응시한다. 여름을 도망치는 동안 종종 당신을 숨겨주었던 바다는 고작 죽음과 닮아있는 것이라며, 그는 바다의 맨얼굴을 말했다. 너울은 사실 피서를 언급한 게 아니라 종말을 발음한 거야. 그러므로 이번엔 계절을 피하러가 아니라, 생을 피하러 바다로 가자. 그가 내일을 길어 올릴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것 말고, 어제를 모두 삼켰던 만큼 깊어 내려간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럼 부력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고도 바라던 침몰을 찾을 수 있어. 생을 피하기 위해 잠기는 몸도 한 모금의 해수조차 푸르게 하지 못하다는 것을, 손이 담기기 전에 이미 흘러간 그는 멍들지 않고도 푸르다는 것을 끝까지 기억해내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을까. 어느 더운 날의 오후엔 하루가 오직 징그럽게 끝나도록 벌레와 양서류를 건넬 거야. 그러니 곤충의 얼굴은 요정처럼 오직 기쁨뿐이다. 타닥이는 날갯짓이 흘리는 가루를 삼키기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그 많은 다리가 벽을 차거나 피부를 스치는 소리에 놀라지 못하고 만지게 되도록. 그의 더듬이도 여러 개의 팔도 당신을 위해 문을 찾으려 하지는 않을 거야. 재빨리 내보내고 지우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여기 또 있어라고 당신은 말하게 된다. 이때 빛은 평소처럼 희망과 관계 맺기보다, 가로등이 가진 게 하루뿐인 괴이한 존재들을 불러 모으듯 또 당신의 생도 그만큼 짧아질 수 있다며 안심시키듯 오로지 초대하는 데만 쓰일 것이다. 이렇게 눈이 밝은 것들은 그 발톱으로 생을 할퀴곤. 비명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귀여움으로 현혹하고, 울음으로 귀를 막는 데 종사한다. 당신의 죄는 그저 야옹이라며. 한여름의 사랑은 이다지도 당신의 머리를 뜯어내기 위해 종사할 테다. 색출도 취조도 총성도 필요치 않고 하루 종일 졸린 잠으로 마감으로. 새에게 쫓긴 날 그가 쪼아 조각하려 했던 것은 하늘에 대한 금물. 꿈을 포개고, 무지개를 기다리고, 구름 뒤에 맑음을 소망하는 인생의 금물. 새는 하늘이 다리를 모두 끊어놓았다는 것만을 당신에게 상기시킨다. 별똥별. 돌이 아니라 쏟아지는 별들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행복, 그 전설을 당신에게 주고 싶었어. 인생이란 화마에 놓는 맞불. 그 여름. 태양은 너무 빛날 테다. 어제와 라일락 향기가 다 증발하기 전에 부디 당신은 껍질만 남은 인간에 이르길. 껍질을 제외하고 모두 탈 때까지 그리고 그 거죽이 모두 눌어붙을 때까지 당신을 도울 테야. 생이 싫다고 했지. 그럼 내가 그 생을 대신 좋아하려 해볼까. 종말을 기다리는 동안 그 시간을 막을 마음은 없어. 대신 종말이 올 때까지 함께 있어주고 말 나. 탄 귀를 만지고, 마른 등을 쓰다듬으며 비로소 여름을 당신에게.


▲ 고현정 ⟪The Sweet Sunburn⟫ 전시 서문에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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