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와 아버지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이야기,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일, 한 사람의 마음엔 한 사람 이상의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보는 일, 그리고 사랑이 죽음으로써 끝난다 해도 사랑의 주검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오래전 내가 읽은 체, 알은 체하고 눈 돌렸던 모든 장면들이 시간도 장소도 심지어 기억도 없이 살아와 끝내 희망을 선물한다. 나는 올 한 해 울지 않았기에 선물을 받는 것이겠지. 그러나 울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순응하고 타협했다는 말과 다른 점이 없지 않을까. 나의 절망을 남에게도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그것을 희망이란 그럴싸한 말로써 그저 삼킨. 어째서 눈물을 흘리지도, 엄격하지도, 책망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끝끝내 당신을 미워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나. 그러니 내가 예찬해야 할 대상은 이제 부정적인 것들이다. 더는 희망을 찾지 않으면서 그리고 이해를 찾지 않으면서 절망과 미움으로써 미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벗은 그 무서운 독을 그만 흩어버리라 하겠지만,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며, 독에 구원이 있다고 믿어보는 일에 나선다. 예술의 한편은 다시 그곳에 종사하려 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자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본에 대한 적대를 끝끝내 가로막는다. 어디 그뿐인가. 착하고 선량한 젠틀맨의 존재가 성별에 대한 적대를 흩트려놓고, 자신은 싫지만 존중은 하겠다는 동정심 많은 호모포비아가 이성애규범성을 지켜낸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릇된 것은 아니라고 말해지거나, 사실 어떤 사람들에게도 선함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해 내려는 희망적 몸짓들이, 현실을 절망으로 삼는 본격적인 적대와 다툼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누군가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려 어떠한 정치적 입장이라 할지라도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동정심이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윤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지점이기보다, 이미 선하거나 악하다고 가정된 관습적인 규칙에 그저 복종하고 안주하는 행동 원리에 불과하다. 지금의 정치적 문제에 배후로서 연루된 윤리는 더 이상 해결의 역량을 가질 수 없다. 선악의 갈등으로 단순화되어버린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윤리로 대체될 수 없는 ‘비윤리’ 혹은 비윤리라는 인식 때문에 상기되는 ‘악’이다. 희미하고 자비로운 빛의 그림자가 걷히자 추한 사람들, 비겁한 몸짓들, 비로소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2
큰 충격을 받은 듯 돌이킬 수 없이 휘어진 윤곽, 삼키지 못하고 뱉어지거나 쏟아져 나오는 잔해물, 조각나 흩어져 주검에 이르면 좋으련만 그럼에도 끝까지 휘청인 채로 끝나지 않는 격발激發의 상황. 신음의 서술어들은 모두 화면 속 하나의 차체를 향해 있지만, 그것은 신체를 향한 형용과 구분되지 않는다. 안민은 <Conscience> 연작에서 사람의 길과 기계의 길을 구분하지 않는 불법 주차된 차량에 폭격을 가했다. 자동차는 그것이 사물인 탓에 조립의 대상이다. 그것은 가해지는 힘 앞에서 너덜대기보다 분리되어야 하고, 사그라들기보다 감축되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안민이 그린 차들은 그것이 분리 가능한 사물들의 조합이 아닌 기관의 유기적인 결합체라는 듯 어느 하나의 부분도 해체되지 않은 채로 찢어지고, 사그라든다. 그것도 표정을 가진 채로. 그로부터 보는 이는 알게 된다. 여기에 가해진 것은 단순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폭력’이며, 그 대상 역시 물질이 아니라 신체라는 것을. 그러나 작가는 폭력을 재현하되 거기에 자연스레 동반될 잔인함은 표백해 버렸다. 신체에 가하는 폭력임에도, 또 신음 소리가 온 곳에 퍼짐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동요되지 않는다.
쉽게 마르지 않는 유채와, 물감을 머금길 거부하는 비닐 원단의 사인 플렉스지는 그 흐름과 빛의 반짝임으로 형태와 힘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선의 정체正體는 수많은 점으로 구성된 집합의 정체停滯가 아니다. 하나의 점이 끊임없이 회전함으로써만 원이 형태를 갖추듯 선의 구성도 이와 마찬가지로 점의 질주를 통해 완성된다. 이들의 물성은 마르지 않고 흡수되지 않음으로써 그러니까 정체되지 않음으로써 차량에 질주하는, 가해지는 힘을 드러낸다. 아니 더 나아가 작가가 그린 것은 대상의 표면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외려 그 표면을 타고 흐르는 힘을 그렸기에 표면이 보일 뿐. 그러나 이토록 정밀하게 폭력이 묘사되고도 동정하는 마음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폭력엔 잔인함이 빠져 있는 까닭이다. 안민은 윤곽도, 무게도 그리고 거기에 가해지는 힘마저도 정확하게 묘사했지만, 정작 사물의 신체가 토해내는 신음만은 데포르메로 생략하고 있다. 마치 동심이 내포돼 있다는 듯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단말마(<Conscience(21월0405)>)나 온몸이 굴복한 것처럼 길게 빼진 혀(<Conscience(53루992x)>, <Conscience(21일0328)>)는 고작 웃음을 잃지 않는 만화 같은 생김새로 다가온다.
폭력에 잔인함이 표백되었다는 것. 그것은 잔혹한 성격의 무언가가 드러나지 않도록 은닉해 놓았다거나, 폭력을 폭력 아닌 것으로 가장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화면에서부터 화면의 조건으로 놓인 물성까지도 무언가를 은닉하거나 가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외려 폭력의 잔인함이 소거되는 까닭은 그 ‘가해’가 마땅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군가 규칙에 어긋난 주차라는 사소함에서 폭력이 시작하는 것의 ‘비약’을 검토하더라도, 혹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노라고 작가의 권능을 물음하는 의심에도 그림의 필치는 굽어지지 않으려 한다. 총보다 많은 인간을 죽인 사물에 대하여, 그리고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은 장소에 대하여 생각할 때 자동차와 차는 그 목록에서 누락되지 않는다. 전염병보다 차량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그러나 그 죽음이 어느 것보다 흔한 것이기에 ‘사건’보다 늘 삶에 편재해 있는 ‘사고’로 여겨지는 때에, 생존한 인간은 도무지 이것에 함의를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비약은 불편을 야기하는 사물에 대한 사소한 불만이 폭력으로 변천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잠재한 사물로부터 더 많고 빈번한 주검을 향해, 부조리한 사회적 타살을 향해 다가가는 비상飛上에 가깝다.
어쩌면 인도를 범하는 주차는 피치 못할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도피나 추적과 관련된 시간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이 그 자리를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그는 사소한 주차에서는 잘못을 저질렀을 테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선량한 인간일 수도 있다. 모든 불행한 사고에는 사회적, 역사적으로 불가항력적인 조건에 비해 나약한 개인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는 따뜻한 윤리가 변명처럼 떠오른다. 그러나 이 따뜻함으로 말미암아 나약한 개인은 더없이 다시 나약해지고 만다. 그에겐 이해와 용인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이제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 이해와 용인이 세계를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고 늘 그대로인 세계로 단정 짓는다. 주차를 단속하는 경관이 지닌 법의 논리가 정녕 세계의 논리와 같다면, 적어도 세계의 질서와 단절하기로 한 예술은 그의 힘을 빌릴 수 없다. 거대한 부조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가장 사소한 부조리에도 같은 복수가 행해져야 한다. 그러니 작품은 논리가 이제껏 금지해 온 사적인 폭력을 통해 처벌을 달성한다. 이제 심판은 지금의 세계의 논리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가 종언된 뒤 다음에 올 세계의 새로운 논리에 의거해 무장하며 재등장하는 것이다.
3
나는 알고 있다. 행복할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그의 음성은 듣기에 따뜻하고, 그의 낯은 보기에 평화롭다. 그러나 내 머리맡 한 편엔 악마 형상의 가면이 걸려 있다. 이마에 툭 불거진 힘줄. 그것은 악한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이고 만다. 부서지는 차가 묻는 것이 아니다. 몸을 부수는 힘이 묻고 있다. ‘그대는 세상의 모든 것에 동의하는가’ 사소한 것에 침묵하면서 거시적인 것들에만 부정을 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거대함을 구성하는 것이 사소함일 때 거역은 가장 작은 층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초대받지 않았더라도 추위 속에 앉아있기를 거부하며, 누군가 지정해 준 고통에서 도무지 만족하지 않는 것. 조그만 기쁨(불만)도 단념하지 않고 갈증을 채우는 것의 보람을 안민의 작품은 느끼려 한다. 어째서 조그마한 이유를 분개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시학만이 잦은 초대를 받고, 그 일에 도리어 보람을 생각하며, 분개를 마땅히 펼쳐내려는 시학은 좀처럼 초대받지 않아왔을까. 부끄러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개가 나서지 않기에 세상이 망가진다는 것을, 윤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윤리의 존재 때문에 미래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붓은 알고 있다. 인간이 너무 인간적인 까닭에 우리의 ‘가해’는 사라지고, ‘이해’와 ‘피해’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하여 붓은 악을 쥐어야겠다. 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예술은 얼마나 더 사무쳐 갈까. / 조재연
참조
김영랑, 「독을 차고」, 『김영랑 시집』, 범우사, 2020
베르톨트 브레히트, 박찬일 옮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민음사, 2018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황현진, 「모두가 허무로부터 다행입니다」, 『문학동네』 100호, 2019
이 글은 ⟪이상이 실제가 될 때⟫ 도록 게재를 위해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