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유쾌한 적은 대부분 없었던 것 같지만, 오늘날에 그것은 어느 시기보다 불안정하거나, 심각하고 폭력적인 격무 위에 올려져 있거나, 박탈당해진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모두가 자본주의는 ‘아니다’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날 드문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운동가의 입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틈틈이 자선기관이나 인도주의기관에 의해서 고발되며 마침내 교황의 입에서도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고통들이 다큐이든 아포리즘이든 대체할 수 없는 정확한 묘사에 의해서 우리의 개탄이나 눈물을 지어낸다고 해서 그것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회피할 수 없는 물음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의 정치가 자본에 반하거나, 거스를 수 있을까’라고 하는 형태일 것이다. 우리는 지체 없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정치를 떠올릴 수 있지만 91년을 전후로한 동구권의 몰락은 그러한 정치형태의 매력을 잃게 하거나 불신에 처하게 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답으로 택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로부터 우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후에 자본에 거스르는 정치를 다시 사유하고 발명해야하는 좌표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비교적 가장 활발하면서도 최근의 논의는-특히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당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어떻게 하면 되살릴 수 있을까, 리부트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겠지만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거의 그리고 더 이상 언급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만 언급되는, 이제는 기대선 안 된다는 개념으로 취급되는 “노동”이다. 노동은 정치에서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이자, 자본에 거스르는 정치를 위한 필수적인 대립항이다.
1 계급과 대표의 역설
노동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삶에서 먹고 사는 일이며, 월급을 받기 위한 일이라고 뻔하고도 상투적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이나 노동과 정치의 연결은 너무나 쉽게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단언되어 버린다. 그러나 정치가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라는 말을 따를 때 그렇다면 노동은 정치와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노동의 정치는 노동자라는 특수한 사회적 신분의 직업집단의 이해를 대표하는 행위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정치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는 중요한 목표를 외면하거나 조난시킨 채, 주어지고 결정된 세계에서 이해나 내용 따위를 다룰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20세기부터 노동의 정치에 대한 지배적인 세태일 것이다.
이때의 논리는 자본의 정치라는 ‘지배의 정치’와 ‘저항의 정치’라는 노동의 정치가 대표를 통해서 맞붙어 있다라는 상황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치’가 ‘자본가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치’와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표의 논리는 심각한 역설에 빠져있다.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푸념은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재현한다. 강남의 잘 사는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따라서 자신들을 대표하는 새누리당에 영리하게 표를 주는 반면에, 강북의 없이 사는 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대표하지 않는 새누리당에 아둔하게 표를 준다. 그것은 자본은 스스로를 대표해내지만 노동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대표하는 데 서투르다거나 실패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은 계급이해에 반해서 행동하는 노동(계급)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이나 노동이 대표의 논리로써 풀이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갖고 있는 역설 즉, 자본과 노동은 양쪽 모두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표의 문제로 환원하는 데 존재하는 역설이다. 첫째로 자본은 스스로를 대표하지 않으며, 대표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결코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그저 각자의 개인의 이익을 충실하게 좇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계급적 행동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대표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노동자조합이나 자본가위원회 따위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각자의 욕망과 이해를 실현하면 세상은 알아서 조정된다고 믿고 있을 뿐이기에 계급대표나 계급투표라는 말은 수용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된다.
자본은 자기 자신을 대표하는 것으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면 노동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을까. 둘째로 노동 역시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다. 오히려 얄궂은 상황은 노동이 자기 자신을 대표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깊은 수렁에 빠지거나 배반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알려지고 주어진 노동은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이 자본의 하나의 항으로, 자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세상의 이치로 놓여진 경제란 ‘모두’의 경제가 아니라 ‘자본’의 경제이기에, 노동하는 자는 항상 자본이 제공하거나 바라보는 눈길 속에서만 스스로를 이해하고 식별할 수 있다.-그러므로 노동은 자신의 경제 즉, 노동의 경제가 아니라 경제 비판으로서만 자신의 이해를 제안하고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윤은 사업을 잘 운영한 성과이고, 임금은 일한 자들에게 지불하는 비용이며, 이자는 돈을 쓴 데에 대한 보답이라는 식이다. 심지어 노동자의 삶을 죽음에 매우 근접한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구조조정 조차도 세상의 이치로 이해했을 때 그것은 경영합리화나 다운사이징, 슬림경영과 같은 사이비 과학 용어와 같은 역겹도록 아름다운 개념으로 수사된다. 이 안에서 노동은 세상의 이치를 좇으면 좇을수록 자신의 이해에 반할 수밖에 없다. 실업은 노동이 “자신의 긍정(사용가치를 낳는 보편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자신의 부정(자신의 노동을 점차 불필요하고 과잉인 것으로 부정하는 노동)을 낳는 힘으로 부정”으로 배반하는 가장 큰 예시일 것이다.
2 대표의 정치
이렇게 대표의 문제로 정치를 사고하는 방식은 87년 민주화 이후의 체제가 드러난 이후에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 자기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자신을 대표할 수 있어야하고, 인종은 인종으로서, 장애인은 장애인으로서,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로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노동자는 노동자 자신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형태로 시민사회운동이 87년 이후에 범람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다양성의 정치이거나 차이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대표의 정치 유형에 속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정치에서 자본과 노동과의 관계를 물음하는 일 따윈 중요하지 않고, 수없이 많은 여성, 인종, 장애인 등의 소수자의 정체성들이 잘 대표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최근에 대표의 정치에 관하여 참고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부터 창궐했던 08년도의 촛불집회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로 최대의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면서 대표의 정치가 보여줄 수 있는 혼란을 가장 잘 드러내주기도 한다. 당시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던 것은 각각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1600개의 시민들의 모임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대표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잉대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는 어떠한 구체적 문제를 대표하지 않는 국민으로서의 과소대표이기도 했다. 과잉대표로 나타나나는 주체는 차이, 다양성 그리고 차별성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사회적 문제를 갖고 있는 사회적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과소대표로 나타나는 주체는 사회적 신분이나 삶의 이해에 대한 무차별성을 갖고 있는 주권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주체는 안전한 쇠고기라는 주장을 가지고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는 점에서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안전한 쇠고기라는 주장을 정말 ‘안전한 쇠고기’로 문자 그대로 주장하는 쪽이 사회적 주체라면 안전한 쇠고기라는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바꾸자라고 말하는 쪽은 주권적 주체였다. 이 혼합되기 어려운 두 주장을 한 편에서는 촛불집회를 정치화한다는 이야기로 비판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촛불집회를 퇴행적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로 반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양립되기 어려운 주장이 통합력을 갖지 못하고 부유하다가 사실상 정치적 지형을 그다지 바꿔놓지 못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
그로부터 여전히 앙상하게 남아있는 것은 여전히 또다시 대표의 정치이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지지로 향했던 것은 그것의 재현일 것이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귀결이 ‘대표의 정치’였고, ‘노동의 정치’마저도 그 대표의 정치의 형식을 따랐지만 만약, 정치가 대표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언급한대로 자본은 스스로를 대표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리고 노동은 스스로를 대표하려고 할 때마다 항상 자본의 편에서만 대표한다면, 우리는 노동을 정치의 조건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대표가 아닌 다른 지점에서 만들어야한다. 이때 우리가 착목해야할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더 이상 대표와 대표로 외적 모순으로 갈등하는 모습이 아니라, 왜 노동은 언제나 스스로를 비대표하는가라는 물음을 담은 자본과 자본 안의 노동이 대표와 비대표로서 내적 모순으로 갈등하는 모습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3 요구의 정치/해방의 정치
그렇기 때문에 노동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고발하는 행위는 이 글의 주제는 아니게 된다. 비정규직, 불안정한 노동, 폭력적인 격무나 파트타이머 등의 구체적이면서도 생생한 체험과 모습은 가난의 시학의 재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정치의 연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난의 시학을 이야기하는 데는 사회과학이나 철학보다는 르포기자가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정치를 옭아매는 것은 비단 대표의 정치만은 아니다. 그것은 대표의 정치의 문제점을 충분히 비판하면서도 ‘노동’/’경제’는 더 이상 쟁점이 되지 못하거나 쟁점을 흐트러뜨릴 뿐 이제는 진보의 쟁점이 다시금 민주주의와 그 자체가 되는 ‘해방의 정치’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정치를 ‘요구의 정치’와 ‘해방의 정치’를 나누는 이분법을 기반으로 한다. 요구의 정치가 주어진 세계의 한계 안에서 협상과 계산에 존재한다면 해방의 정치는 요구의 정치를 부정하면서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해 물음하고 다른 세계가 가능한 근본적인 행위가 정치임을 역설한다. 이 관점에서 대표의 정치는 자신을 대표해줄 에이전시와 중개자라는 대표를 통해서 이해를 요구하는 요구의 정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지지자들은 노동운동이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오늘날 탈산업화 후의 지식과 정보, 감성, 감정이 착취의 대상이 된 오늘날의 시기에는 더 이상 해방의 정치의 근거가 노동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해방의 정치가 필요한 것은 오로지 무차별적으로 구체적 이해로 분할되지 않으면서 우리 사회를 결정할 수 있는 인민 혹은 시티즌이라는 존재이며 이들을 통해서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기획아래에서 공산주의라는 사고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정치란 요구의 정치이기보다는 해방의 정치여야한다는 입장은 진보 정치를 사고하는 이들이 배울 점도 있으며 옳은 듯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인민 혹은 시티즌이라는 주체와 노동을 쉽게 분절시키는 사고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민, 시민 혹은 국민을 하나의 주체인 주권자라고 말할 때 그 개념은 노동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그자체로 노동은 정치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4 소유; 노동; 권리
주권자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리가 권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 특히 주권자라고 이야기할 때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은 “소유”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가장 먼저 무엇을 가질 수 있는 주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노동이다.
권리라는 것은 먼저 권리가 존재하고 그것을 가지게 되는 행위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라는 개념의 출현 후에야 가능하다. 소유라는 개념의 출현은 근대 민주주의 혁명 혹은 정치적 근대성이라고 불리우는 것 중에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소유의 근거는 자유로운 자신의 몸과 정신의 노동이 투여되었다는 것이다. 소유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동의 결실을 스스로 영위하고 가진다는 관점을 의미할 때, 소유의 근거는 무엇보다 노동이라는 점에서 노동은 항상 소유라는 관념과 불가분하다. 다시 말해서, 노동이란 스스로 일함으로써 스스로를 온전히 또 오롯이 소유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나’는 권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귀족과 맞서 혁명을 일으킨 동기도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동의 결실과 성과를 구할 수 있는 권리의 혁명은 소유의 혁명이자 노동의 혁명이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부여했거나 신의 섭리, 자연에 따른 것이 아니고 오직 모든 권리의 기초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몸,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권은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이면서도 교과서적으로 ‘취업’할 권리나 ‘취업’을 위해서 국가의 노력을 촉구하고 요청할 권리로 해설되지만, 그것은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권리를 가진 개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의 요구를 의미하기도 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가 모든 상품의 가치의 원천이 노동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것은 소유의 혁명에서 오는 하나의 스캔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주장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자리매김할 때 황급하게 철회되거나 수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노동자는 일을 하면 할수록 부유해져야만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빈곤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학은 가능한 노동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는 것을 선택하면서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서 시장경제 내지 판매자와 구매자의 문제로만이 설명 가능한 개념으로 변하는 것이 필요한 수순이었다.
이를 위한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보다 노동을 소유의 근거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마르크스식으로 표현하자면 노동의 상품화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로부터 연장된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오늘날 임금의 실종이다. 우리는 더 이상 노동이 임금의 대상이 아닌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마치 모두가 메이저리그의 프로야구선수인척 혹은 예술가인척하면서 노동에 대한 보상이 아닌 창의성, 열정, 진취성, 역량에 대한 연봉을 임금대신 요청하고 부여받는다. 노동의 보상으로서의 임금과 개인의 역량에 대한 연봉의 차이는 무엇보다 노동이 더 이상 사회적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느 개인도 노동이나 그에 대한 결실을 개인적으로만 혹은 사적으로만 생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량으로서 보상을 판단하는 행위는 노동을 노동 없음의 노동으로 혹은 개별화된 노동으로 취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이 자본 안에서 상품화되고 그것이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지위를 은폐당한 것과 함께 근대 민주주의 혁명이 ‘인민’과 ‘시민’이라는 말이 나오고도 가짜란 것이 판명난 것은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실업자와 빈민이었다. 그것은 주권자라는 말이 소유에 따른 권리라고 할 때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무산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즉 이러한 문제는 권리를 가진 주체가 자신의 개인적 삶을 소유하고 있다면, 반드시 노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노동권은 앞서 말했듯이 취업을 할 수 있는 권리인 듯 말해지지만 그것은 애초에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 혹은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과 시민권의 바탕이자 초석이 소유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노동을 염두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소유와 권리의 실현에서 노동은 불가결한 개념이 된다.
5 노동권의 전락
이러한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프랑스혁명으로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 논쟁의 매듭이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사회주의 탄생’이거나 ‘사회의 탄생’이었다. 노동권은 권리를 요구하는 권리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사회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적이였으며, 사회를 대상으로하는 정치의 탄생이었다. 무산자가 처하고 있는 실업, 질병, 사망, 산업재해 등의 영역은 애초에 자본 밖의 영역이면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국가는 그것을 더 이상 사적 문제로의 취급이나 구휼 따위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치환하면서 관리하게 된다. 그 치환은 동시에 권리의 보장 혹은 안전으로의 치환을 의미하며 보험체계를 포함한 사회국가(복지국가)의 출현을 의미했다. 사적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것이란 예컨대 국가가 질병과 같은 문제를 특정한 한 개인을 염두해두지 않고 사회란 덩어리 안에서 그러한 질병의 발생을 확률에 대입하여 그러한 뭉뚱그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 개의 변화를 낳았다. 첫 번째는 그로부터 대다수의 노동자는 사회적 권리를 위한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한 편-해방의 정치-을 포기하고 다양한 보장을 늘리기 위한 운동-요구의 정치-만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두 번째는 그렇게 변화한 노동운동의 대상인 사회적 권리란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한해서의 보장이었기에, 노동자의 정체성을 실업으로 박탈당한 집합과 헤게모니나 기타 담론에 의해서 침식당한 노동자의 여집합을 급속도로 노동의 정치에서 이탈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변화는 앞선 변화의 결과물이었다. 권리를 가진 개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의 요구였던 노동권 즉, 인권·시민권에서 분리할 수 없는 노동권은 고작 고용사업을 국가에 요구할 권리나 심각하게는 고용되어있는 사람들을 위한 권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오늘날에는 무색해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노동권을 전락의 바닥끝까지 내려놓았다. 국가에 대한 고용사업의 요구는 기업의 규제완화나 투자활성화라는 자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그것의 본질조차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고, 고용되어있는 사람들을 위한 권리마저 연금개혁 등의 모습으로 축소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비단 노동권에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사회’ 자체를 소멸시키거나 해체시키고 있다가 보아야 할 것이다. 있는 자들이 세금을 거부할 때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돈을 초과하는 사회에 대한 연대의 거부 혹은 스스로의 사회적 존재 자격의 거부라는 점에서 그것은 곳곳에 만연한다.
6 제거할 수 없는 자리
그러나 노동권이 희미해졌다고 해서 혹은 비관적으로 그것이 사실 오래전에 소멸되었다고 해서 노동의 정치 그 자체가 사라졌다고는 볼 수 없다. 노동이라는 문제를 경유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소유관계의 변화를 꾀하기 위한 어떠한 질문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존재와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필연적인 조건이다. 자본은 일자리를 구하는 실업자들의 존재를 통해서 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해고의 위협 속에서 보다 강화된 격무과 장시간 노동,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 이하로의 임금의 인하를 끊임없이 관철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산업예비군은 자연발생적이면서 불균등하게 발전하는 자본주의 생산에 대해 자유로운 노동력의 원천으로서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가 감히 해결할 수 없는 실업을 둘러싼 질병, 산업재해, 사망 등의 문제는 여전히 사회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자기증식의 결과는 언제나 상대적 과잉인구로서 실업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해결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실업은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에 불변항 즉, 제거할 수 없는 자리에 놓여진다. 그러한 점에서 실업을 둘러싼 문제는 그것이 노동 없음의 상태나 비노동의 상태로의 정의에서 벗어나 노동의 문제라는 사고로의 전환이 가능한데, 이때 우리는 자본 안의 노동이 아니라 자본 밖의 노동을 사유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본 밖의 노동은 실업을 쟁점으로 할 때 비로소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노동의 정치를 되살려내고 뛰어들기를 요청하는 이유는 노동(노동권)이란 관념을 경유해서만 우리의 인민·시민이란 주권자의 자격을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과 인권 혹은 시민권의 자격은 분리되어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초에 그것은 소유와 그것의 근거인 노동을 매개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여기서의 노동은 일자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소유에 대한 참여를 의미한다. 세계를 바꾸는 데에는 인민이 중요하고 그만이 주체이지만, 어떤 인민도 추상적인 무로부터 출현한 인민이가 아니라 이미 권리를 ‘소유’한 주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노동으로부터 떨어져나올 수 없다. 우리는 곳곳에서 19세기의 무렵의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무산자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면, 권리, 소유, 노동을 어떻게 이을지에 대한 물음에 다시금 답해져야한다. 그리고 물음은 노동자라는 특수한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모든 주권자를 향한다는 점에서 마침내 그 모두는 사회의 구성적 내용을 대표를 통해 요구하는 정치가 아니라, 모두가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해방의 정치를 노동을 담보하면서 실현할 수 있다. 비록 노동자의 권리는 몰락에 처해있지만, 노동에 근거한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노동은 정치에서 제거할 수 없는 자리이자 자본의 대립항이다. / 조재연
*참조
– 서동진,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 《변증법의 낮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