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바톤, 배윤환 개인전
배윤환은 사회 부조리를 우화 기법으로 화폭에 펼친다. 자본주의, 환경 파괴, 지역 이기주의 등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작가의 직간접적 경험과 결합해 스토리텔링으로 풀어왔다. 자칫 무거워 보이는 주제지만 그의 그림은 진지함과는 거리를 둔다. 캔버스에는 금방이라도 동화책에서 튀어나올 듯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동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토끼와 코알라, 북극곰, 늑대 등 의인화된 캐릭터는 주제를 유쾌하고 쉽게 전달하는 매개체다. 그리고 이러한 화법 저변에는 배윤환만의 풍자와 해학이 깔려있다.
풍자와 해학은 비판적 표현의 한 갈래지만, 일반적인 비판과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이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메시지를 논리적이고 건조하게 옮긴다면, 풍자와 해학의 포인트는 ‘익살’이다. 풍자는 비판의 대상을 희화해 문제의 원인을 공격한다. 해학은 그 문제로 피해를 본 대상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 사안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를 의도한다. 까딱하면 어렵고 거부감이 들 수 있는 비판과 달리, 감정을 수반한 풍자와 해학은 감상자를 논리적인 설득은 물론 공감으로 이끈다. 진지하지 않지만 진정성 있는 그림. 배윤환 회화의 힘은 여기에 있다.
미술의 주변부, 열등감은 나의 힘
굳이 엘리트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미술계엔 중심이 되는 지역과 학교가 있다. 여기서 벗어나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 역시 드문 일이 아니다. 배윤환도 다르지 않았다. 작가는 충주에서 태어났다. 그림이 좋았지만 공부엔 관심이 없어 서원대에 진학했고, 이모 댁과 가깝다는 이유로 경원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작가 인생을 시작했지만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선 ‘백수 하나 나왔구나’ 하는 근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고, 감정 기저엔 늘 어떤 패배감이 존재했다.
그러나 배윤환은 그 우울한 감정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 작업에 반영하기로 했다. “눈물 젖은 빵 얘기가 아니다. 마이너리티 정서가 외려 내게 힘을 줬다. 슬픔과 분노를 동력 삼았다고 해야 할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보다 그때 그 감정을 작업의 에너지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초기 작업에는 동화적 분위기를 내세운 최근작보다 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이 녹아있다. 배윤환의 초반 주제는 피할 수 없는 삶의 굴레에 대한 실존적 선택으로 요약된다. 강제된 사회적 조건을 반영하듯 모노톤이나 소수 컬러만을 사용했고, 귀스타브 도레와 프란시스코 고야를 모티프 삼아 일상에서 관찰한 사회의 암면을 그림으로 선보였다.
연작으로 발표한 <수처작주(隨處作主)>(2012), <입처개진(立處皆眞)>(2012)은 투견판을 묘사한 작품이다. 한쪽에서는 투견의 싸움을 다른 개가 지켜보고, 다른 편에서는 싸움이 끝나고 폐견이 된 개가 고통에 몸부림친다. “벽을 마주해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것은 넘어서야 할 문제 혹은 싸움의 대상처럼 느껴진다.” 예술가는 캔버스 앞에서 뭔가를 물어뜯듯 분투하지만 그것이 곧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삶의 주인이 되라’는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말처럼 성패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리라는 결론을 내린다.
배윤환은 <클리프 행어>(2014)에서 이러한 주제를 사회 전체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했다. 벽에 고정한 천에 지하철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펼쳤다. 열차 손잡이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승객, 허겁지겁 토스트를 먹는 여자의 입, 물감이 굳은 옷을 입은 화가, 과장되게 일그러진 얼굴 등 하루하루 버텨내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다면을 그렸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지하철을 탈 때면 손잡이에 겨우 몸을 지탱한 사람들, 고기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인생의 곡선과 굴레, 같은 곳을 돌고 도는 지하철에서 우리 모두 어떻게든 뭔가 해보겠다고 다 같이 매달려 있었다.” 어둡고 거친 분위기로 묘사했지만 그것이 그림의 전부는 아니다. 화면엔 육중한 현실과 함께 그것에 무너지지 않는 안광이 희망처럼 흐른다. ‘회화의 종말’이 선언된 이후에도 그림을 멈추지 않는 화가처럼, 위태로우면서도 가능성이 있는 모습이 지하철의 수많은 동선과 궤적을 닮았다고 느꼈다.
<Was It a Cat I Saw?>(2014)는 작가가 접한 정치 사건과 이야기, 우화, 개인적 경험 등을 한데 풀어낸 대형 회화다. 장장 50미터에 달하는 작품을 일부가 말린 상태로 공개해 궁금증을 유발하도록 연출했다. 순서 없이 갖가지 에피소드가 얽힌 화면은 사회적 사안이 개인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사회로 환원되는 현실을 은유한다. 이러한 구조를 반영해 작품 제목도 회문으로 지었다. 철자를 뒤집어도 똑같은 문장은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의 대사. 작중 체셔 고양이는 길을 묻는 앨리스에게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렸다”라고 답한다. 상황에 상관없이 삶의 주인이 되라는 기존 작품의 주제는 여기서도 연결된다.
한편 〈숨 쉬는 섬〉(2017)에서 배윤환은 자동기술법을 시도했다. 작가의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과 감정, 동물, 그림 재료 등을 나열해 내면의 풍경을 그렸다. 배윤환은 이탈로 칼비노 소설 『나무 위의 남작』에 작품을 비유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권위적인 아버지를 피해 나무에 오른다. 하지만 그에게 나무는 은둔의 장소가 아니라 세상을 한걸음 떨어져 관망하게 하는 매개다. 소설의 나무는 배윤환의 섬과 유사하다. 작가의 모든 것이 표현된 섬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장소이자 과거의 ‘나’와 거리를 두고 변화를 맞이하는 매개다. 그리고 이 성찰 끝에 작가는 이른바 ‘블랙의 시대’에 안녕을 고했다.
진정성 담은 유머의 미학
배윤환의 초기작은 자신의 삶과 감정을 사회적 배경으로 확장하는 형식을 띤다. 작가에게 슬픔과 분노는 작업의 모티브인 동시에 탈출구였다. 고통을 낱낱이 토로하고 나면 그것이 언젠가 사라지거나 잊힐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상처의 재현이 지나간 아픔을 되살리거나, 현실의 거대한 벽을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또한 블랙을 주조색으로 사용하는 작업의 한계도 느껴졌다. 조형성을 강조하기 위한 모노톤이 반대로 묘사를 가로막는 것처럼 다가왔다. 이러한 판단에서 작가는 개인전 <랍스타 쿼드릴>(챕터투 야드 2020. 10. 15~11. 28)을 끝으로 모노톤 작업과 결별했다. 그동안 쓰지 않았던 다양한 컬러를 사용하고, 개인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방향을 뒤집어 거시적인 의제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갤러리바톤에서 열린 개인전 <What? In My Back Yard?!>(2022. 6. 29~7. 30)는 변화의 신호탄 같은 전시였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 주제는 ‘환경’. 전 지구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개인을 소재 삼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끌렸다. 님비 현상을 키워드로 난개발이 동물의 서식지를 위협하는 상황을 그렸다. 보금자리를 잃고 인간에게 쫓기지만 캐릭터의 표정은 불안보다 익살에 더 가깝다. 개인을 소재 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반대로 그만큼 개인에게 와닿지 않는 문제라는 말이기도 하다. 배윤환은 이 지점을 유머로 돌파했다. 등장인물의 짓궂은 얼굴은 감상자를 설득하기보다 그들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도록 이끈다.
<송곳니들을 위한 자장가>(2022)는 미국과 호주의 동물 관리 정책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피곤해 보이는 늑대와 우스꽝스럽게 분한 토끼가 등장한다. 멸종 위기종에서 개체 수 증가로 미국 정부의 퇴치 대상이 된 늑대는 언제 사냥감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면증에 시달린다. 반면 호주는 토끼를 유해 동물로 지정했지만 결국 개체 수 조절에 실패했다. 이에 토끼가 나서 살아남는 데 유용했던 노하우로 늑대를 돕는다는 발상이다. 천적인 늑대를 재우기 위해 모빌, 향초, 술 등을 분주하게 펼치는 토끼와, 무심히 엎드려 그들을 따르는 늑대의 연대는 동화적 유토피아에 가깝다. 어쩌면 동물 보호라는 주제엔 피를 흘리고 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늑대의 모습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잠 역시 굶주림과 죽음에 비해 소박한 소재다. 그러나 마음은 잔인하고 사실적인 묘사보다 웃고 공감할 수 있는 그림에 더 오래 머무른다. 배윤환 회화의 해학은 여기서 힘을 얻는다.
앞선 작품이 배윤환의 해학을 보여준다면 <광부들과 황금 분수대>(2022)는 풍자가 돋보인다. 무너지는 금광에서 광부는 닥친 재난보다 눈앞의 금에 열중한다. 광산의 위험을 감지한 새 카나리아가 목청을 높여 경고하지만, 광부에게 이들의 노래는 황금 발견을 축하하는 배경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직접적으로는 황금 만능주의를, 간접적으로는 환경 문제가 시급한 상황에도 여전히 개발과 이윤 창출에 눈이 먼 현대인을 꼬집는다. 작가는 동굴 내부를 파티장처럼 연출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캐릭터를 비추고, 그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손을 높여 환호한다. 그러나 천장 틈으로 들어오는 빛은 참사의 전조고, 광부의 열기는 동굴의 붕괴를 부채질한다. 그림에 유머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장면 후의 상상은 더 끔찍해진다. 그리고 이들의 어리석음에 웃음 짓는 감상자에게 작품은 묻는다. 우리의 즐거움도 재난에 걸쳐있는 것이 아니냐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꾸준히 던져왔지만 배윤환은 ‘의식 있는 작가’라는 세간의 인식을 한사코 거절했다. “나는 그린피스에 후원하지도 않고, 그냥 분리수거 잘하고, 여전히 디젤차를 타는 사람이다. 사회적 주제를 소재로 이용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찰나라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배윤환이 서식지가 파괴된 동물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부동산 문제로 한창 은행을 전전했을 때였다. 이 말을 듣고 작가의 그림이 어떤 지점에서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이해했다. 배윤환의 말대로 그는 의식 있는 작가도 사회 운동가도 아니다. 그는 열등감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보통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마찬가지로 보통의 사람인 관객이 쉽게 그의 주제에 다가갈 수 있다. 어렵고 고상한 언어가 아니라 일상에서 가치로 향하는 길을 그의 그림은 연다.
『아트인컬처』 2023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