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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부조리하다. 삶의 도처에 부조리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부조리하다. 삼성 반도체 공장서는 필연적으로 백혈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한번쯤 갤럭시를 소유했고 평균적으로 13일을 12시간씩 가혹하게 일하면서도 그런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물음에 “그 정도로 인간의 몸은 망가지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애플의 대표적인 제조사인 폭스콘에 대해 듣고서도 아이폰의 예술성의 감탄하며 그를 다시 소유했다. 파업이 노동계급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인상적인 권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피부 위로 걸음하는 대중교통의 파업 소식에는 속이 상했다. 이런 것들이, 아니 그 외에도 무수한 경멸적인 문제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경이란 것이 시야에 그려질 때는 그것을 부정할 뻔 하다가도, 그것이 삐걱될 때마다 무수히 고개를 숙이는 숫자와 기호들의 그래프를 보면서 불안해하고 복구를 기도했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를 끌어안은 인간의 최선은 아마도 자본주의라는 세계를 통체로 부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주변에서 아니면 스스로만이라도 구제되길 바라는 선택들에 골몰하는 것이었다. 그런 선택들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착하게도 공정 무역을 위시한 착한 커피를 사먹는 것, 조금은 덜 자본주의적이고 조금은 더 공동체적인 마을 만들기, 집을 공유 하는 것(셰어하우스) 그리고 조금 더 없는 자들을 위한 착한 이율의 대안 은행, 마지막으로 유니세프에 매달 3만원씩 자동이체하는 것까지. 그리고 이러한 ‘깨알 같은’ 프로젝트들을 관통하는 정신이란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그렇게 행복이란, 정답이란 알 수 없는 상태의 부조리와 그리고 어떻게든 수리되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막강한 자본주의 앞에선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악인 듯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와 주변에 물음했다. 어찌하여 기꺼이 이르를 수 있는 행복을 거머쥐지 않고 불행을 거절하지 않는가. 기꺼이 행복할 줄 아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자. 그 물음에 잠깐 쉼표를 내리며 묻고 싶다. 진심? 과연 그래도 좋을까. 우리는 널리 목적자체 목적으로 간주되는 행복이란 생각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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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는 대부분의 철학자와 지식인의 과제이겠지만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만큼 그것을 정확하게 다룬 인물은 드물다. 그는 귀족계급 안의 하류계층이었으며, 식민지 버마의 경찰이면서 회의하는 자이기도 했고, 인민전선에서 자유주의와 협력하는 사회주의자이면서 (소련)사회주의로부터 실망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신체서부터 이념까지 그 어디보다 치열하게 부조리함이 얽혀 있곤 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삶이 부조리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결론이 행복에 이르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는 아마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정색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1943)에서 그는 사회주의자-그리고 굳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경이 달갑지 않고 부정하고 싶은 사람이라면-가 행복을 목표로 하는 것이 어째서 온당하지 못한 것인지 밝혀준다.
그가 포착하는 행복이란 대게 불행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구체적인’ 것과의 대비라는 관점을 통해서만 창조되고 상상되어지는 또 하나의 ‘구체적인’ 것들이다. 노동이 없는 끊임없는 휴식에서부터 가난이 없는 영원한 황금, 비싼 물가와는 다른 싼 고기와 아름다운 여성들까지, 행복과 유토피아를 위시하는 작품을 쓴 대표적인 작가인 디킨스와 웰스의 작품을 언급하며 행복이란 그림은 결국 현재의 구체적인 불행과 관계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묘사하는 데 실패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이때 우린 부정(否定)이라고는 모르는 행복의 백치와도 같은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오늘의 “비참함, 빈곤, 질병” 등의 부재가 행복으로 간주되었을 때 우리가 인식의 작용으로써 행하는 것은 부정(否定)이 될 수 없는 부정이다.
부정-곧 비판인-은 스피노자의 “부정이란 규정이고, 규정이란 부정이다.”라는 말을 따를 때, 부정은 단순히 “틀리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오류의 지적이나 거부를 의미하는 것에서 벗어나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생성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계를 부정함이란 자유로운 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세계가 틀렸다며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끝까지 추궁하는 일이다. 세계를 자본주의란 하나의 그림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우리를 상품화하고 물신성에 사로잡히도록 하여 자유롭지 못한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추궁하듯이. 그러나 단순히 행복을 목표로 하는 것은 어떠한 규정도 갖고 있지 않은 채로-당연히 탐색도 추궁도 없이- 조급한 욕망에만 머물도록 만든다. 이런 백치 같은 면모 아래선 우리는 갖갖이의 불행의 모습을 알고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관류되어있는지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으며 또 궁극적으로는 어떤 세계라고 규정되는 원인을 반성해내지도 못한 채 지체한다. 그러는 한 우리는 주어진 세계를 관리하고 조직하는 것에서 그칠 뿐 어떠한 세계에 존재할지를 결정하는 대문자로 쓴 정치에는 조금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란 불가능할 것이 틀림없다.
물론 오웰은 불행한 “세상에 살지 않는 것, 노골적이고 고루한 선생들로 가득한, 잡초 하나 없는 깨끗한 전원주택지에서 아침을 맞이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사실상 의식적인 정치적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동기가 파시스트 운동을 창궐하게 했다는 것 또한 동시에 인정하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이미 부정에 관한 백치인 행복이 만들어낸 몇 가지의 이상한 풍경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북유럽국가들의 사회(복지)국가 형태는 대부분의 좌파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되지만 그들의 충만한 복지를 제공할 경제력은 신자유주의를 충실히 이행하는 그들이 소유한 다국적기업들로부터 나온다는 것, 제2차세계대전과 베트남전과 같은 큼지막한 전쟁들은 어김없이 호황이라고 부를만한 특수를 누리게 했다는 것, 그리고 행복을 그리며 창출했던 지난 정권과 현 정권은 모두 윤리적인 면에서 행복이라는 알리바이를 댔다는 것은 행복이 어떻게 ‘옳음’과는 무관한지에 대해서 그리고 목표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사유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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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유로부터 오웰은 “지금까지 행복은 하나의 부산물”이었고 진정한 목표는 “인류애”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인류애에 대한 역설은 행복이라는 가치와 의미상의 우위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치의 형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행복은 언급한 것처럼 구체적인 대비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주어진 즉, 경험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것들이다. 반면에 인류애는 그런 것들로는 축소할 수 없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창출해내려고 하는 사회적인 관계, 운동이라는 형태를 띤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관계, 운동이란 주어진 세계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행복이 미래에 대한 “자세한 예언”에 충실한다면 인류애는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거대한 전략”의 층위에 머문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불행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 속에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래서 오웰은 그 순수한 “싸움 그 자체 속”을 인류애로써 주장했다. 그러므로 굳이 오웰이 선택한 “인류애”라는 단어 대신에 다른 말을 대입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평등한 세상일 수도 있고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사회가 될 수도 있다. 아무렴 최근에 유행하는 “사람사는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가 행복이란 구체적인 현실로 번역되는 것은 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오웰의 이 같은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또한 덧붙여 기꺼이 불행과 머물 수 있기를 감히 희망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행복이 목표가 되지 않고 그것들을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가 목표로 된 이후에, 우리의 실천들이 스스로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한다해도 그것들과 머물 수 있기를 요청하고 싶다. 이는 단순히 영원한 운동을 표상하는 인류애가 결국 어쩌다 행복을 담보하지 못할까봐 노파심에 섞여 하는 요청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과정과 결과물의 도처는 필연적으로 불편하고 불행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전제에 가깝다. 옳은 것에는 그리고 진보는 언제나 포기-희생보다는 양보에 가까운-하는 것들이 따른다. 민주주의의 평등의 원리가 가장 낮은 자를 가장 고귀한 자로 취급하자는 것이 아닌 가장 고귀한 자도 가장 낮은 자와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하듯 그리고 경제정의가 무엇인가를 더욱더 생산해내는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더 나누는 것에 있듯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싸움 그 자체 속”을 유지하면서 더불어 기꺼이 불행과 머물기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글 첫머리에 서술했던 부조리를 가장 정당하게 파훼하는 법이기도 하다. / 조재연
*참조
– 조지 오웰(박경서 옮김),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 《영국식 살인의 쇠퇴》
– 서동진, 「지루한 행복」, 《변증법의 낮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