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록 얼어붙고 고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간에 존재를 흘려보내려는 것이 또 공간으로 발하려 하는 것이 있다. 동그라미가 ‘평면 위의 한 점에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점들의 집합’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시간도 공간도 갖지 않은 셈이지만, ‘일정점을 원점으로 하여 평면상을 회전하는 폐곡선’을 뜻한다면 그것은 어느새 시공간 안을 흐르고 차지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머리가 꼬리를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식별이 불가능하도록 빠르게 회전하는 까닭이다. 비명도 발작도 없이 정지된 평면만이 강조된 것이 그림의 본질이나 운명이라고 전하는 것은, 임동승이 말한 “영화적인 면모, 강점이 회화의 영역에서 비본질적이고 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기”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운명을 거스르는 것과 따르는 것이란 양자의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은 과녁을 빗나간다. “무엇을 그려야 하고 무엇을 그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누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할 수가 없어졌다. 정지의 결정이 발생을 가능하게 만들고, 발생을 결정한 곳에서 정지가 증식된다. 그러니 그리는 자가 이제 해야 할 것은 그것에 “항상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 이후에 나서는 것이다. 임동승의 《TRANS》는 어느 입장을 선택하든지, 결국 반대의 선택의 책무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6개의 X자⟩는 어떤 것보다도 비활동적인 것 같다. 꾸덕하게 발라진 유채는 유채 뒤에 모든 것을 가두고 질식시켰다. 여섯 개의 X자는 그 폐쇄를 어떻게든 찢고 나오려던 몸부림을 기운 것일 테다. 어겹이 진 장막은 어떻게 해서든 움직임을 보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두께만큼 표명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그 장막이 두꺼워질수록 그 두께만큼, 장막 뒤의―이후의― 활동성을 예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작업은 앞으로도 낭중지추일 배후를 위해 몇 개의 X자를 덧붙는 쪽으로 흐를 것 같다. 반대로 ⟨죽음과 소녀들⟩은 어떤 것보다도 활동적이다. 평행하는 직선은 찾아볼 수 없는 곡선의 신체뿐인 이 그림은 오직 운동하는 존재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인간의 옆에 늘 같은 자세의 죽음의 형상이 섰을 때, ‘그 주검도 움직일 수 있을까’라는 상상이 먼저 떠오르면서도, ‘인간 역시 이미 생명을 잃은 존재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지우기는 어렵다. 운동만을 나타내는 활동적인 존재들은 외려 운동하기 때문에 그 힘을 다 소진하고 정지한 상태에 도달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노역 끝에 다다랐고 이제 꼭 멈출 것만 같다. 별의 근본적인 정적임은 부동성에 가까운 물질적 운동에 의해, 파도의 영원한 기울음은 적요한 바다에 의해.
⟨변신⟩에서는 혈관도 근육도 분별해 볼 수 없다. 그는 몰락한 것처럼 거꾸러져 있는 주검에 가깝고, 주검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처럼 장기와 뼈가 돌출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의 한 발은 폭발 속에 절단되어 있다. 손쉬운 것은 절단 이전의 발을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전시는 도통 그쪽을 향해 다가가기 어렵게 한다. 그것은, ‘어떤’ 발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뛰는 발, 오르는 발 혹은 발작하는 발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저 어떤 수식어도 붙일 수 없는 순수한 발, 순수한 움직임 즉 어떠한 발이 아니라 그저 발이라고 외치는 발을 사유하게 만든다. 그 발은 ‘어떤’ 발 하나가 아니라 모든 ‘어떤’ 발을 함축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수한 운동은 자신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에 의해서만 또다시 드러난다. 몰락과 거꾸러짐, 돌출된 뼈와 장기 이후에도 이 절단된 ‘발’이 있어 그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림의 본질은 운동하는 영화의 면모를 배제하고 극단적인 부동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만으로 오직 부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만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변신할 때면 장면 속의 주인공은 부산하게 움직여야 했지만, 그를 제외한, 적을 포함한 모두는 시간도 공간도 잃은 것처럼 정지해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그림은 그와 같이 외친다. 자- 변신이다. 멈추어 있는 건 그림이 아니라 우리다.
■ 『월간미술』 202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