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tunainforest가 비평웹진 퐁에서 기획한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 중에서 필자의 답을 모은 글이다. 본 기획에는 미술, 만화, 영화, 음악 각 분야의 비평가가 참여했다.
tunainforest (이하 T) 처음으로 글을 썼을 때,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재연 (이하 J) 아마도 이런 대답은 아둔한 편에 속하겠지요? 저는 이미 몇 편의 문장들을 쓰고 난 후에야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또 마음에 둔 일이 ‘글쓰기’임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첫 글을 어떤 연유에서 썼는지에 대해서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계속 쓰는 이유라면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글을 쓰게 된 이유와 다르지 않길 바라봅니다.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는 청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같이 드라마를 볼 때면 그는 내게 방금 극 속 인물이 무엇을 말했는지 묻고는 했죠. 같이 나눈 대화에도 많은 것들이 그에겐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이따금씩 느끼기도 했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으로부터 느낀, 내가 경험한 세상과 그가 경험하는 세상이 다르다는 사실은 제가 많은 것을 불확실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학년이 올라가 반이 바뀌기라도 하면 밖에서 친구를 만나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어요. 제가 그를 기억하는 것처럼 그가 저를 기억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잃어버린 친구들도 있었지요.
이젠 결코 어머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지만, 내가 느끼는 느낌과 기분 그리고 의미가 누군가가 가진 것과 다르다는 사실은 여전히 저를 힘들게 해요. 어렸을 때 잃었던 친구처럼 내일이면 모두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떨곤 해요. 그리고 이런 슬픔과 두려움은 비단 제게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못했어요. 그래서 말로 전해졌으나 말이 아니게 된 것, 말 없는 것이기에 읽히지도 발음되지도 못하는 것, 영영 눈에 밟히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저는 쓰고 싶었어요.
‘설명’하고 싶었어요. 내가(그것이) ‘달다’고 하는 미감은 어떻게 혀가 물들 때 발음하는 단어인지, 내가(그것이) ‘아름답다’하는 정서가 어떻게 존재를 흔들 때 뱉을 수밖에 없는 개념인지. 비평의 목표 중에 하나일 ‘정확하다’라는 말은 제게 어떤 대상에 대해서 결코 대체 불가능할 하나의 단어 내지 문장을 지시하지 않아요. 외려 수없이 대체 가능하도록, 그만큼 그것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정해진 자리에서 가장 멀리 밀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제 글이 일상적으로 말하는 ‘정확함’에 대응한다고 자신하지는 않아요. 단, 가장 멀어진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사이에 있는 것들 역시 이해받아 모든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고 있지요.
T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J 글을 쓸 때면 늘 바닥을 보아요. 왜 나는 이렇게 못난 말밖에 할 수 없는지, 왜 더 좋은 문장을 찾을 수 없는지, 어째서 새로운 생각 없이 지난 생각을 반복하는지. 세상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그러니 매번 물을 수밖에요. 그럼에도 왜 굳이 내가 써야 하는지를요. 글을 쓴다는 건 매번 제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지를 깨닫는 일과 같다고 생각해요.
세계, 변혁, 투쟁, 운동, 진리, 희망, 사랑, 윤리……. 이런 터무니없는 단어를 글에서 지껄이다가 생각했어요. 나는 내가 쓰는 것처럼 살고 있을까. 누군가 제 글을 보고 제가 그 문장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누군가 저를 좋은 사람이라 오해할까봐 겁이 났어요. 그래서였을 거예요. 철학자의 말이나 개념에서 글을 시작했던 방식에서 저를 고백하듯 토로하듯 글을 시작하게 된 것은. 도무지 세상은, 예술은 어떻다는 식으로 글을 시작할 수 없어요. 다만, 저는 비겁하고 작은 사람이지만 그 비겁하고 작은 사람이 어떻게 저 터무니없는 단어에 도달할 수 있는지 보이고 싶었어요. 가치가 고귀함에서 시작되는 일보다 외려 비천한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 그 가치에 대한 증명은 더 확고해지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믿으려 합니다.
물론 그 고백만으로 글을 다 채울 수는 없겠죠. 여전히 터무니없는 단어들로 글을 채우고도 있고요. 그러나 그러다 보면, 그렇게 척이라도 하다 보면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몇 번을 제 바닥을 확인하면 제가 쓰고 싶은 것과 가까운 사람이, 좋은 사람이 언젠가 되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냐고요? 글은 제가 별로인 사람이란 것을 알게 해요. 그리고 별로가 아닌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꿈꾸게 합니다.
T 글을 쓰는 것과 삶 사이를 이어줄, 지속 가능한 연결고리 같은 게 있을까요.
J 2021년 3월부터 미술전문지 아트인컬처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국어 입시 학원에서 6년 정도를 강사로 일했어요. 국어 입시 학원에서 일한 이유는 비교적 적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과 예술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까닭이 컸어요. 너무 동떨어진 일을 한다면 다시는 예술계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국어 강사만큼 많은 문학을 반복해서 또 집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직업은 몇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같은 시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그것을 설명해야 하니까요. 물론 다양한 해석은 허락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윤선도부터 이육사, 김기림, 나희덕, 함민복, 이성복, 진은영 같은 시인들의 문장은 내가 써야 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늘 가르침을 주곤 했어요. 지금도 제 글에서 그들의 문장이 살아 있어요.
아트인컬처는 비평을 쓸 때부터 꿈처럼 바랐던 곳이었어요. 글을 쓰는 것이 생업인 삶, 그 연장선에서도 그랬고, 의미 있는 일을 ‘함께’ 한다는 것이 많이 그리웠어요. 늘 혼자서 일을 해왔기에 동료가 있었던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꿈보다 더 좋은 동료들을 만났어요. 가난한 능력 탓에 좌충우돌하고 애를 먹을 때가 많지만 소중한 시간들을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함께 혹은 홀로 전시를 보고, 그 전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쓴 글과 타인이 쓴 글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고. 지금의 이런 일상이 지속 가능하길 바라요.
어느 날 글을 쓰는 것과 삶 사이를 이어줄, 지속 가능한 연결고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글을 계속 쓰고 있기를 바라요. 어떤 연결고리가, 무엇이 저를 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저이기 때문에 쓰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도 글을 쓰는 것은 피치 못할 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