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정거장_2023 대구권 미술대 연합전 PLATFORM

2023 대구권 미술대학 연합전 《PLATFORM》(기획: 박천)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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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의 작가와 그들을 엮은 18개 주제전. 대규모 전시를 정거장(platform)에 빗대는 것은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키워드로는 도무지 꿰뚫을 수 없는 저마다의 풍경이 있고, 각자의 목적지를 지닌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장소에서 플랫폼보다 더 나은 비유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 배후에 이들을 싣고 나르는 ‘기차’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이곳이 그저 꾸러미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1850년에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라는 명제를 제시했고, 3년 뒤 미셸 슈발리에는 철도 건설을 “몇 세기 전의 교회 건축에 비견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잔 벅모스는 이 시기를 “철도는 지시물이었고 진보는 기호였다. 공간적 운동은 역사적 운동과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기에 철도와 진보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다.”(『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1989)고 정리한다. 이처럼 19세기 이래로 기차는 진보의 은유였고, 진보는 모더니티의 이념이었다.

그러니 현대미술의 시발점인 인상주의가 철도의 전국적 구축으로 촉발되었다는 해석은 넓은 층위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또한 1895년 상영된 최초의 영화(뤼미에르 형제, 〈열차의 도착〉)의 주인공이 기차라는 사실은 일종의 신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술(가)은 기차를 통해 물리적으로 다른 풍경에 도착한 것은 물론, 그 속도 위에서 현실과 인식 사이 균열을 일으키는 ‘다른 세계’를 목격했다. 물리적으로도, 인식적으로도 기차는 ‘지금 여기’의 ‘이후’를 향하는 가장 급진적인 포털이었다. 그리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모든 예술(가)은 여전히 기차에 타있다. 여기엔 세 부류의 승객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열차를 통해 노선의 가장 먼 곳으로 가려 할 테고, 누군가는 어느 간이역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칸에서 내려 머무를 것이다. 어떤 이는 열차를 폭파해 멈춰 세우는 절정을 꿈꿀지도 모른다. 《PLATFORM》(2023. 12. 26~1. 28 대구예술발전소)은 오직 그러한 기차의 관점에서 읽어져야 한다. 열차라는 층위에서 여기 졸업이라는 출발점에 선 신진들은, 사회의 시선과는 반대로 누구도 출발점에 선 적이 없으며 또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김명신 〈have a dream〉 캔버스에 유채 112.2×162.2cm 2023
정해리 〈인상〉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162.2cm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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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엔 예술사가 수없이 반복하는 표현과 주제임에도 그것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진부함과 싸우며 다시 시작하려는 고뇌가 있는 한편, 캐논으론 펼칠 수 없는 새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자 예술(적 규범) 자체와 싸우는 모험이 공존한다. 전자에는 작가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무능한 역사를 학대한 제의의 흔적이, 후자엔 언어가 규범의 통제를 벗어나 날뛴 축제의 흔적이 남는다. 가령 재현은 예술에서 가장 오래된 의무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모방하는 것에서 일정한 관점으로 현실을 재편하는 것까지, 재현은 여직 거스를 수 없는 본령이다. 김명신과 김기범은 그 전통을 명징하게 잇는 대신 주체와 시대의 관점을 전환한다. 두 명의 그림은 분명 오늘의 풍경을 품으면서도 시대와 그 주체를 등지는 서늘함을 내뱉는다. 문명의 생산물과 달리 그를 사용할 어떤 인명도 존재하지 않는 화면. 이들은 단순한 새벽을 넘어 ‘인간 이후’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여기 공허한 거리의 시침은 인간이 사라진 시기를 가리킬지도 모른다. 감도는 서늘함은 낮밤의 ‘시간’이 아닌 다른 ‘시대’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사물이 세계의 주인이 된 이시대異時代. 비로소 우리는 인간의 것이 아닌 다른 눈을 빌어 내일을 보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박경준은 밝은 분위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부재감을 강조한다. 어린이날, 아버지날 등을 모티프 삼은 작품은 해당 주제라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배역을 고의로 누락했다. 주인을 잃은 장난감과 패밀리 카. 그림은 부재를 통해 존재의 정체성을 되묻고, 화면을 차지한 한 줌의 문명이 어째서 작품 전체의 주제, 나아가 세계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의심한다. 반대로 정해리와 안형진의 재현은 대상의 표면이 아닌 내부의 운동 ‘생’을 향해 나아간다. 시간 위에서 운동하지 않는(멈춰있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상주의에서 미래주의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진리 중 하나는, 멈춰있는 순간이 그림의 전부일지라도 대상은 정지하지 않는다는 진실에 한없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해리는 탄생과 죽음, 불화와 화해, 만남과 이별 등의 생의 총체를 한 화면에 겹쳐 펼쳤다. 창세기부터 묵시록, 모든 시간이 단번에 쏟아진다. 안형진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을 진동하며 무한과 유한이라는 개념을 대조한다. 태양이 영원히 뜨거운 상태로 죽어가듯 불은 영원히 견고한 상태로 그을음(죽음)을 맞이한다.

임은택 〈And the son saidunto him,Father, I havesinned againstheaven,and in thy sight,and am no more worthy〉 스테인리스강, 아크 용접 각 51×100×100cm 2023
정혜진 〈화면 너머〉 혼합재료 200×200×200cm 2023

의식과 무의식이 깨어있음과 깨어있지 않음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가르는 기준은 방향이다. 하이데거가 정의하듯 존재와 현존은 스스로를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통해 자신이 ‘어떤’ 세계에 존재하는지 깨닫고, 그 어떠함에 대해 물음하는 것으로 나뉜다. 단순히 ‘있음’을 넘어 현존으로 도달하게 하는 주체의 확장, 그것이 의식의 유무를 규정한다. 반면 무의식은 세계의 외부가 아니라 세계를 어떤 방식의 인식으로 유도하는 내부의 원인을 탐색한다. 다시 말해서, 전자가 사회나 제도의 설계도를 분석한다면 후자는 그곳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은밀한 일들을 해석한다. 정혜진의 〈화면 너머〉(2023)는 미디어로 중계되는 현실과 그 장막 너머를 상상하게 하는 이중의 관점으로 사회를 조망한다. 그러나 영사되는 이미지에도, 영사 바깥에서도 우리가 줄거리를 얻는 길은 차단되어 있다. 작가는 너머를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어떤 안팎에서도 총체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한계로 점철된 상태. 이 경계는 불가능으로써 불가지론에서 깨어나려 했던 비판철학의 궤도와 나란히 겹쳐진다.

정혜진이 사회상을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했다면, 임은택은 자본에 결탁한 사회를 겨냥하면서도 이를 종교적 비유로 감싸 난해함을 더한다. 그러나 이 까다로움은 정당하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를 벗어나는 길과, 유물론적 존재가 형이상에 침입하는 경로는 종교적 사유에 빚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작가의 설치는 ‘돌아온 탕자’로 알려진 누가복음의 문장을 형상화한 것이다. 성경의 말씀처럼 금빛으로 포장된 길은 구원의 상실을 의미하는 뒤집힌 십자가에 도착한다. 그러나 (반)그리스도적인 삶이 황금의 길을 연다고 반대로 읽을 수도 있다. 현실은 양자의 진동 안에 있다. 반면 강혜진과 김도희가 질문하는 것은 의식을 침식하는 무의식의 감각이다. 명료하지 않은 형상에서 식별 가능한 대상을 발명하는 아포페니아(apophenia)처럼 두 작가는 무의미한 이미지를 내세워, 그것에서 강박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무의식을 양각한다. 강혜진에게서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지를 기호, 색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계시할 구상적 존재로 흘러가고, 김도희에게서는 선분의 틈 사이 미지의 공간으로 주저앉는다.

이가은 〈Fright〉 캔버스에 유채 116.8×80.3cm 2023
최연주 〈잠시〉 캔버스에 유채 112.1×145.5cm 2023

오늘날 거대 서사는 더는 거악과 싸우는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성과 속, 미와 추. 가치와 효용 등 상반된 것들이 동등해진 시기. 이곳을 살아내는 존재는 이제 영웅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삶 자체, 즉 무의미와 싸워야 하는 신경증적인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론 미시 서사가 거대 서사를 이끄는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 작품이 일상의 강박 대신 그 배면에 위치한, 다시 말해 그를 만들어낸 현실을 보게 하는 재해석의 순간, 거대 서사는 잠복 속에서 성립한다. 이가은의 그림은 고통에 빠진 한 여성을 내세운다. 얼핏 흔하게 마주하는 사소한 감정적 반응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은, 피 묻은 상의를 포함한 〈Fear〉(2023)의 노골적인 표현과 만날 때 그 배경을 사회(의 폭력)를 향해 미끄러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Fright〉(2023)의 인물이 경계하는 빛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혐오일지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Way home〉(2023)은 무의미한 눈빛에서 성을 타자화하는 시선으로, 〈Empty〉(2023)는 외로움의 표현에서 폭력에 고립된 상황으로 번진다.

일상과 익명으로 대표되는 미시 서사, 그리고 정치·윤리ּּ를 콘텍스트 삼은 거대 서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일상과 익명은 본디 가장 정치적인 표정이었다. 영웅과 왕, 귀족도 아닌 개인이 캔버스로 처음 소환됐을 때 그는 제 이름 대신 ‘민중’이라는 다중의 정체성으로 출현했다. 지저분하고 통속적인 민중의 생활에 대한 재현.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봉건적 위계를 뒤집는 민주적 정신의 발현이었고 이후 미술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실천이었던 사실주의의 출발점이 됐다. 그리고 민중이 저마다 제 이름을 갖는 민주주의가 성취된 이후에도 미시 서사는 여전히 귀중하다. 일상의 영역이 화폐의 지배와 상품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최소한의 보루로서 남아있는 까닭이다. 그저 걷거나 멈춘, 만나거나 헤어지는 사람들…. 권수현과 최연주의 작품은 매일 반복되고 말 흔하디흔한 일상을 화면으로 펼쳤다. 그러나 쿠르베, 밀레, 도미에가 어느 이념에도 합류하지 않는 비의미로 체제를 넘어섰듯 의미를 찾지 못한 일상은 그 무용함으로 쓸모만을 요구하는 세상을 거스르는 부표가 된다.

신화에서 영웅으로, 영웅에서 민중으로, 다시 민중에서 개인으로 이어지는 미술사는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 ‘타자’를 주체화하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여성과 흑인, 퀴어 등을 내세운 그림이 주목받는 것 역시 같은 흐름 안에 놓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가장 동시대적인 타자는 누구일까. 다양한 대상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 자연을 아우르는 의미에서의 — 사물을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이는 멀게는 들뢰즈, 가깝게는 브뤼노 라투르와 도나 해러웨이가 ‘사물의 의회’를 주창하며 제시한 신유물론의 주제다. 인간의 소비를 위해서 도구 혹은 자원으로 규정된 사물은 현재 가장 착취당하는 타자라는 것. 해방에 대한 이념이 ‘나중된 자의 먼저됨’ 즉 위계의 역전을 동력 삼는 것이라면 전선은 사물 사이에 형성된다. 버려진 사물과 폐허의 재구성, 의인화를 넘어 인간 행위에 개입하는 자연물 등을 모티프로 한 예술표현의 출현은 이러한 사상적 맥락을 배경으로 지닌다.

임현주 〈Hybrid x hypia〉 혼합재료 60×100×70cm 2023

임현주의 작품에서 이미지가 드러내는 것은 작가의 예술성이 아닌 사물의 존재적 역량이다. 과거의 예술이 재료의 가공과 변주, 재구성에서 시작되었다면, 〈Welcome〉(2023)이 내보이는 것은 차마 가다듬을 수 없었던 사물의 물성이다. 대리석 조각에서 재료가 그의 강도와 표면을 감췄던 것과는 달리 이곳의 사물은 작가의 의도에도, 본래 생산자가 부여한 도구의 목적에도 수긍하지 않는다. 괴이한 형상을 갖췄지만 그 ‘괴이’를 완성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존재감을 용도로부터 벗어나 감각으로서 펼치기로 한 사물의 결단이다. 전자가 사물의 존재 형식을 다룬다면 이민지가 형상화하는 것은 그것의 행위 역량이다. 미술은 감상자와 관계없이 개시된다. 회화는 늘 하나의 표정을 지녔으며, 영상은 보는 이가 없어도 재생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감상자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그러나 〈playgon〉(2023)이 요청하는 것은 그 반대다. 작품은 관객의 걸음을 통해 작동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순간 자신의 고귀한 존엄을 내려놓고 사물의 뜻대로 자신을 맡겨 움직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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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미술이라는 개념은 미술사에 담긴 시기와 사조의 구분을 기각한다. 어제와 오늘 심지어 내일마저도 동시대라는 낱말에 똑같이 빨려 들어가고,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과 표현을 이념이 아니라 그저 동시대(의 차이)로 환원해 버리는 상황에서 모더니티가 지녔던 ‘진보’는 시효를 잃는다. 진보란 이념을 경유해 과거와 현재를 분절하는 것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PLATFORM》을 통과하는 기차는 그러한 주장에 저항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재현과 비재현, 의식과 무의식, 거대 서사와 미시 서사, 주체와 타자 등 전시가 제시하는 컨템퍼러리의 주제는 한 공간에서 시차와 거리를 지니면서도 함께 계시된다. 계몽과 산업혁명, 사회주의 등을 통해 선형적으로 발생했던 진보는 그쳤을지 모르나 이를 두고 굴복할 필요는 없다. 전복은 이제 동시에 다발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은유로서의 정거장은 각각의 정착지인 동시에 서로 다른 노선의 합류지다. ‘다른 세계’로 향하는 단 하나의 길은 지금 이 자리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든 전환을 향해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시계탑에 총을 쏘고 지난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영영 열차표를 잃어버릴 수 없다. 우리는 진부함과도 싸워야 하지만 새로움과도 싸워야 한다. 오늘의 질문을 던지는 것만큼, 완벽하게 답해지지 않은 어제의 물음을 반복하는 것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랑이 변하는 것보다도 그에 입맞췄던 입술이 늙는 일. 내게는 그런 나날이 더 많았다는 것을 정거장에서 돌이켰다. 열차는 늘 정확했다. 사랑과 존경을 담아, 함께 다음 정거장에서 만나기를 바라고 싶다.

참조
신형철,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봉준호」,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신형철, 「어떤 순간의 진심 -신철규 〈유빙〉」,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사, 2018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5
서동진, 「지금의 기원: 9X0X를 시대구분하기」, 『큐레이팅 9X0X』, 아트선재센터, 2021

◼︎ 대구권 미술대 연합전 《PLATFORM》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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