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전체에 대하여; 영화 <당통(Danton), 1983>

지난 12월 10일 서울시는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를 결정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시민위원회를 결성해 수차례의 회의를 모았고, 인권헌장의 내용 역시 특이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부터의 연역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권헌장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소통·합의의 부재의 반증으로 이해한 것에서 발생했다. 민주주의의 정치란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하는 정치이기에 반대가 격렬하다면 그것은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추진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했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므로 재고하여 충분한 소통과 합의를 거쳐야한다는 주장은 그자체로 민주적이면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 찝찝한 일이고 분통스런 느낌 또한 제공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영화 <당통>이 표상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당통(Danton), 1983>은 냉엄한 영화다. 그것이 냉엄한 이유는 감독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가 폴란드인의 눈으로 프랑스에서 프랑스의 역사와 영웅을 다뤘다는 객관성에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구체적 삶의 맥락이라는 주관성에 부유한다. 그의 젊은 날은 온통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창궐하던 시기였다. 유년기는 나치 점령기였으며, 1939년에는 폴란드의 기병대였던 그의 아버지가 소련의 포로로 잡혀 총살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건이 그를 우파적 성향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폭압적인 공산당 정부에서 여럿 자유노조 파업들을 지지하고 참여했으며 그가 당대에 착목한 것은 일련의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표상하는 전체와 보편의 이름으로 실행된 부분과 소통, 합의의 질식이었다. 그렇기에 <당통>은 그러한 착목 아래에서 그가 연대(자유)노조운동에 참여하면서 부딪쳤던 운동 지도부의 부패, 과단성, 광기와 같은 다양한 성격들과 그에 대한 운동적 반성을 구현해 냈기에 냉엄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그래서 ‘당통(제라르 디빠르디유)’은 그가 반성 속에서 보존시키고 구축하고자하는 부분과 소통 등을 은유하는 민주주의의 화신처럼 등장하고, ‘로베스피에르(워즈시에크 사조니악)’는 그가 반대하고자하는 전체와 보편을 앞세워 질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스탈린이나 광기에 어린 운동 지도부를 은유하는 전체주의, 파시즘의 화신처럼 등장한다.

영화는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공화정 2년에서부터 시작한다. 로베스피에르를 대표로하는 공안위원회는 혁명 후에 스스로의 이상에 함몰된 맹목적 관료장치로 눈이 멀어있다. 공안위원회는 혁명과 정의란 이름으로 보편과 전체를 내세우며 오로지 어떠한 비판도 없이 복종하기만을 요구한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그 어떤 타협도 좇지 않으며, 혁명의 이상을 강요하고 강제하는 존재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부와 사치스러운 것과 거리를 두기위해 포도주나 화려한 치장을 거절하는 모습은 그것을 인상 깊게 표현한다. 반면에 당통은 그러한 로베스피에르와 영화 내내 대조된다. 로베스피에르와 달리 당통은 평범하고 예사로운 행복을 역설한다.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거리의 인민들의 평범한 안녕을 위한 일이야말로 혁명과 인민들이 오로지 원했던 것이라고, 그는 영화 내내 되풀이해 말한다. 그 대결에서 당통은 결국 민주주의, 부분 그리고 소통의 순교자가 된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주의란 환상이었어.”라는 고백과 같은 읊조림을 끝으로 당통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영화는 끝나고 만다.

분명, 영화는 논쟁적이었다. <당통>이 개봉했을 때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들이 당통의 미화를 불편하면서도 불쾌하게 여겼으며 그와 그의 영화를 비판했다. 그러나 오늘 날에 와서 그가 당통의 편을 들었던 것은 꽤나 세련되고 진보적인 시각이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안제이 바이다가 영화를 제작했던 시기에 창궐했었던 (역사)수정주의는 오늘날 역사에 대한 참신한 기억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프랑스 대혁명을 세계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역적이며 부르주아 계급에 국한된 일이었음을 논증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한 시각에서 프랑스 혁명이나 로베스피에르가 내세웠었던 보편과 전체는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맥락, 차이, 경험, 이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그들을 윽박지르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고, 전체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보편성의 존재는 부정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프랑스 혁명과 로베스피에르가 가지고 있는 소통의 부재라는 난폭성은 후의 유럽정치의 모든 전제정치의 씨앗 즉, 스탈린과 강제 수용소로 이어진 근대 정치의 모든 불길한 씨앗으로 담겨져 있다는 협박과 직면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났을 때, 감독의 시각은 그리 탐탁지 않게 느껴졌다. 그 탐탁지 않음이란 12월 10일의 서울시인권헌장 폐기에 소통과 합의의 부재가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알리바이를 제공했을 때의 느낌과 동일한 것이었다. 감독이 당통의 편을 들어 소통과 합의 그리고 행복을 이야기 할 때, 그는 한 가지 놀라운 간과를 저지른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골고루 이로울 수 있기 위해서 부분 부분 살필 수 있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손쉽게 망각했다. 분명 소통과 합의는 우리가 놓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가침의 불문율로 간주되지만, 그것은 다음 두 가지의 문제적인 사유를 전제하거나 은유한다. 그것이 첫째로 전제하는 사유는 ‘전체 없음’이다. 이 사유는 세계를 나눌 수 있는 혹은 공통으로 묶어낼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서로 특수한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져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전체 없음’이란 사유는 ‘옳다’라고 하는 주장 즉,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윤리적인 판단과 상관한다. 전체가 없는 소통과 합의의 세계에서 선호되는 것은 ‘옳다’라는 것보다는 합의되어진 것 혹은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사유가 비롯되어 전제된다. 바로 ‘보편적인 것은 없다’라거나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진리는 없다’라는 식으로 진술되는 ‘보편성 없음’이라는 사유다. 그렇기에 전체와 보편이 있다는 주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리의 이름으로 개체들을 단죄하고 억압하며 종국에는 파국적인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위협되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프랑스 혁명이 내놓았던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대상은 프랑스라고 불리는 풍속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혹은 어떠한 특정한 생활양식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체이다. 인간과 시민이라고 하는 개의 이름은 가지고 있는 출신, 종교, 학력 등의 삶의 구체적인 특색·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전체에게 분배될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점에서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혁명은 보편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라는 주장이 여론에 맡겨질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과학자에게 질문이 던져질 수도 없다는 점에서 바로 그렇다. 그저 그것은 소통이나 합의의 부재 위에서 선언되고 주장되고 강요될 뿐이며 오직 그렇게만 존재할 있다. 그것은 분명 안제이 바이다에게 프랑스 혁명을 비판적으로 다룰 있는 빌미를 제공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비판은 역사 속에서 근대 정치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의 원리를 창설하는 것으로써 작동했다는 역시 기억될 때에 온전하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권리의 주장에 있어서 로베스피에르들의 광기만을 기억하는 망각은 그것을 파시즘과 전체주의로부터 떨어뜨릴 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서울시인권헌장를 폐기시키는 것과 같이 바라지 않았던 배제와 차별을 보존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15 씨네21 임지현 기자는인간보다 혁명보다 인간!”(2000)이라는 기사에서 <당통> 기꺼이 혁명에 전유되고 종속될 있을 거라고 믿었던 20대가 아닌 삶이나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 30대에 봤기에 당통의 편에서 이해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20대에 <당통> 마주했다. 분명 혁명이 인간을 종속시키거나 전유할 없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당통으로는 혁명이나 진보를 상상 없다는 것에 고민하고 싶다. 그것은 다시 , 우리가 전체에 대하여 이야기할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로베스피에르가 친근했고, 그가 고민 끝에선 몰락이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삶이나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 30대에도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조재연

*참조
서동진,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부정은 그토록 어려운가」, 말과활
– 서동진, [문화비평]일베, 광주 그리고 역사 감각, 경향신문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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