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판에 총_구나: 너와나와너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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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잠언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의심쩍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전하며 늘 오늘을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자랑스럽게 논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낱말을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죄책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요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이때 ‘시간’은 적금 만기일이 도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타임라인 혹은 타임 세일이라는 행사 속에 종사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소실하는 일은 ‘지금’이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항 사이에서 도려낼 때 야기된다. 시간은 모순적인 관계항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재를 따로 도려낼 때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는 현재를 획득하긴커녕 시간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에 연루하게 된다. 과거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이후’—80년 5월 이후나 14년 4월 이후와 같은—라는 기준점을 가지고 그러한 과거에 대한 부정과 지양이라는 관계에서 위치한다. 반면 미래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현재에 존재해야 했으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을 위한 시간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지양을 수행하는 관계에 놓인다. 결국 과거와 미래라는 항을 놓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지금의 세계가 과거와는 달랐고 또 미래에 역시 달라질 것이란 세계의 변혁 가능성을 견지하는 일이며, 존재에게는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에 믿음을 보태는 일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빈 도시에서 폐허의 모습이 드러남을 발견하고, 스미스슨은 막 탄생한 건축물이 처음부터 폐허로서 건설되는 것임을 느낀다. 그때 이러한 시각들은 여전히 사상思想으로서 시간이 존재할 때 작동되는 것이다. 시대가 견고한 고체처럼 언제까지 지속될 때—비판이 있을 때조차 오히려 그 비판을 견디는 견고함을 증명할 때— 사상으로서의 시간은 그 견고함이 얼마나 물렁물렁한지를 계시한다.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거나 견고하든 산맥은 시간 위에서 물렁물렁한 법이다. 그리고 시간이 존재의 태도하고는 어떤 상관도 없이 흐를 것이란 사유하고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현재를 사는 이에게, 어제도 내일도 다 같은 오늘이거나 현재일 뿐인 그에게, 시대는 어떤 것보다 견고하고 영원하다. 시대가 고정된 것이라면 존재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편에 서거나 무엇도 할 필요가 없는 편에 서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이처럼 모순적인 시간 위에서 시대는 늘 견고함을 무릅쓰고 녹아내리는 것이 된다. 그럴 때 비판은 가치를 가지게 되며, 존재는 시대의 반영물을 초과해 시대의 형성에 참전하는 주체로서 역능을 가질 수 있다.

지금의 시간을 따돌리며 사적史的인 시간을 가지는 것은 고체로서의 시대에 그것의 본성일 융해성을 다시 확인하는 일과 동조하며, 이는 다시 그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존재의 역능을 확약하는 것으로서 삼위三位를 이룬다. 그리고 ‘지금’의 시간만이 부유하고 있거나 ’시간’없음의 세계에서, 예술은 시간에 대적함으로써 시간을 수복하는 일에 나선다. 그것은 일반적이지만 귀중한 의미로 예술이, 과거나 현재에 허용된 가능한 것들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위반적인 상상이며 미래에 도래할 것을 앞당기는 것을 통해 시간의 형성으로서 대적에 헌신해온 까닭이다.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천박한 예술이 그 사소함만으로도 비판일 수 있었던 배후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에 활약하는 예술들이 ‘동시대 예술(미술)’이기를 자처할 때 ‘동시대’라는 낱말은 ‘현재를 살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늘 의심스럽다. 내일도, 모레도 동시대일 그곳에 미래란 시간은 도대체 있을까. 하나같이 미래를 보거나 미래에서 온 것임을 주장했던 예술은 왜 소박하게도 오늘에 정착하고 말았는가. 다시 말해서, ‘지금’의 시간에 대적하는 예술이야말로 비판의 전승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즉 그것만으로는 삼위 중 하나를 놓친다. 예술은 시간을 전제하고, 비판으로서 미래를 그리는 것과 더불어 시대가 융해적인 것임을, 그래서 거꾸러질 수 있는 것임을 밝혀야 한다. 이는 사물이, 존재가, 그래서 세계가 발생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나의 『너와나와너와나』(갤러리 기체, 2019.10.31-11.21)는 그런 한에서 시간이 무엇인지를,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준다. 작업은 시간을 대적하기 위해 발생에 관한 것이 된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전까지 주목받던 것은 ‘그것’이 어떤 정체인지에 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전시는 ‘그것’을 감히 고정시키거나 추정하지 않는다. 진실은 정지된 순간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인 까닭이다. 즉 전시는 그것이 ‘발생’했거나 여전히 발생하는 중이며 발생할 것임을 보이려 한다. 그렇게 『너와나와너와나』에서 세계는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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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미술은 어떻게 시간을 상수로 함유할 수 있는가. 가령 원을 규정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일정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정한 점을 원점으로 하여 선분 AB를 평면상에 회전시켜 만들어진 닫힌곡선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전자의 원이 지금 드러난 그대로의 순간에 대한 정의라 한다면 후자는 원의 발생에 대한 정의이다. 원이 순간에 의해서 규정될 때 그것은 정지된 형태만을 드러내지만, 발생에 의해서 규정될 때 원은 존재가 파악하기 전에는 무엇이었는지(선분), 파악한 와중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회전) 그리고 그 이후에는 무엇이 될지(멈출지, 확장될지 혹은 변용될지 등) 사유하게 만든다. 정의가 순간에 대한 것을 가리킬 때 그것이 전제하는 것은 (순간의)영원성이거나 ‘지금 여기’로만 환원될 수 있는 편협한 모든 것이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발생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일은 그것이 과거와 미래를 소유한 대상이라는 것은 물론, 그것이 원이 될 수 있었던 것만큼 다른 것도 될 수 있다는 잠재적인 역능을 확인한다.

‘너와나와너와나’라는 제목은 어떠한 서사를 담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발생적인 규정을 함축하고 있다. ‘너’와 ‘나’의 교착은 ‘우리’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두 번을 교착하고서도 끝끝내 ‘우리’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원이 어떤 선분의 회전의 발생이듯 ‘우리’를 발생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교차의 발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너와 나를 한꺼번에 가리키는 대명사’라 표현하는 것은 순간에 대한 정의이다. 반면, ‘우리’가 ‘너와나와너와나’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한 발생적 정의이다. 의미는 ‘우리’가 되기 전에 ‘너’가 있었고 ‘나’가 있었던 과거로부터 질주해 온다.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가 교착하는 것을 정지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와(and)’로 반복해 발생시킨다. 질주는 계속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지금은 ‘우리’일지라도 과거에선 잠재적으로 ‘너’와 ‘나’였으며, 미래에도 ‘우리’라는 대명사만으로 고착되지 않을 것임을 제목은 알린다. 전시는 이렇게 시간의 장에 문을 두드린다.

「화이트 본 프롬 어드레스」의 집게 발을 지닌 ‘게’는 어딘가로 떠나려 하거나 도착하고 있다. 그는 여행지를 향해 갈 것이기 때문에 여객에 대한 안내문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혹은 도착했기 때문에 그 글과는 떨어져 있는데—, 그것이 그가 어딘가로부터 이동하려는 상태이며—혹은 도착한 상태이며— 적어도 고정되거나 정착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떠나온 과거의 시간과 떠나갈 미래의 시간을 동시에 보여준다. 즉 ‘지금 여기’에 현재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가 상존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게’가, 이동과 도착이라는, 서로를 지양하는 것에 대해서 동시에 말하는 것은 작업이 상대하는 시간이 모순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게가 존재하는 곳은 모래사장도 아니고 수중도 아니다. 게는 그 둘 중 어느 한 곳에 있어야만 하지 않는가. 이 물음의 지점에서 작업은 되묻는다. 어째서 게가 도착한 나무판자와 종이가 모래와 물이 아니란 말인가. 판자와 종이가 여기까지 오는데 한 방울의 물이나 한 줌의 모래도 들어가지 않았는가, 혹은 판자와 종이가 지나치게 긴 미래에서 거대한 물줄기와 모래에 잠길 잠재성은 결코 부재하는가. 작업은 답하고 있다. 현재만을 부유하는 존재에게 작업은 이질적이지만 시간을 가진 존재에게 이 모습은 당위적이거나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전시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오거나, 오랜 시간을 떠밀어 가는 것으로써 ‘판자와 종이’가 ‘모래와 물’에 상반되지만 동일한 것임을, 현재의 견고한 시대란 그렇게 녹아내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업이 멈춰져 있지만 발생한다는 것과 발생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시간을 전제하는 것 안에서 「긴목」의 좌대와 같은 모양의 조각, 그 위의 단풍, 단풍에 연결된 머리칼과 가는 철사 역시 하나의 완벽하고 온전한 나무일 수 있다. 도무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강하게 부착되거나 연결되지도 않은 것들은 파편을 이루기는커녕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동일하다고 말하거나 하나인 것이라 강하게 주장한다. 긴 시간 위에서 조각은 좌대가 아닌 줄기일 수 있으며 철사는 가지가, 머리칼은 그것에 걸린 구름일 수 있다. 인간이 애써 만든 오늘에 강하게 굳어진 것처럼 보이는 문명은 시간을 대적할 때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연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허무섞인 물음에 부정할 수 없는 긍정으로 기대와 지지를 보낸다. 이러한 측면은 「화이트 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할 것이다. 전시 공간이란 신체의 장에서, 그것은 온전한 ‘뼈’이다. 그것은 당장은 ‘뼈’가 아니지만 먼 과거로부터 도착한 뼈이거나 먼 미래에 뼈로 도착할 조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화이트 본’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순한 기하학적 조형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전시에서 작업은 항상 발생적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시간을 염두에 놓고는 ‘뼈’인 것에서 ‘뼈가 아닌 것’으로 발생하고 있거나 ‘뼈가 아닌 것’에서 ‘뼈’로 발생하고 있다.

이렇게 설치에 해당하는 세 작업은, 이질적인 것이 어떻게 하나의 구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시간에 대적한다. 한편에 회화로 전개된 작업은 하나에로 결합이라는 구성이 아니라 변용이라는 서사로 시간에 대적한다. 우리는 기어코 「권진규의 스카프를 맨 여인」, 「물빛얼굴」, 「화이트블랙돌사이베이지오렌지두눈」, 「너와나와너와나」, 「무제」 그리고 「엔젤」에서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고자 할 것이다. 심지어 가장 인간의 형상과 멀어보이는 「에메랄드베이지죽음」에서조차 인간 신체의 형상을 발견하고자 주선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상용 수석壽石에서 인간의 형상을 추출하는 것만큼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보다 바위의 단면이나 물결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 편에서 더 많은 단서와 단단한 증거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회화들이 구획된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의 평면으로 수렴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위에서라면 어떤 서사로 이해될 수 있다. 살아가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외부와 맞서거나 패하는 발생의 연속이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공간 위에 덩그러니 놓인 늘 같은 덩어리일 뿐이다. 현재라는 시간만 있다면 인간은 덩어리 존재로 전락한다. 그 신세는 그저 주어진 변함을 체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내맡길 뿐이다. 그런 이해로는 그가 과거를 견뎌왔을,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질 역능을 감지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그 역능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존재에 대한 발생적인 표면에서다. 살아가는 주체인 인간은 시대 안에서 살아가면서 여러 힘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것은 사소하게는 중력의 힘일 것이고 거창하게는 사회의 통제일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주체는 스스로의 형상을 빼앗기고 있으나 완강하게 버티고 있고, 빼앗겼으나 자신의 본질을 비판이라는 실천을 통해 되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회화 속의 동학動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인 인간들이 아니라 삶을 되찾고 있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어쩌면 그저 ‘현재’라는 상황 속에 흡수되고 있지만 완강히 버티고 있으며, 이미 흡수되어 상황과 분리되지 않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맞서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바위나 물결 속으로 사라져가나 인간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고수하고 있으며, 이미 바위나 물결이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다시 상기하자. 지금의 시간을 따돌리며 사적인 시간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 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시대의 본질을 재발명하는 것, 결국 그 변혁을 가능하게끔 하는 존재의 역능을 확약하는 것으로서 일체一體의 삼위가 존재한다. 언급한 작업들에서도 또 그렇지 않은 작업들에서도 전시는, 미술이 시간예술이 아니라는 일반론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것은 전시가 시간이 아니라면, 발생론적인 관점이 아니라면, 이해될 수 없는 까닭이다. 현재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재고하는 모순적인 시간의 관계항 속에서야 의미를 쟁취한다. 그것은 현재의 견고함을 무릅쓰고 시대와 세계가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존재가 그것을 녹아내리게 만드는 주체가 될 수 없다면,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할 것이라는 포고에 가깝다. 극복해낸 과거와, 현재를 다시 극복해낼 미래를 모르는 근대인은 단지 오늘이라는 현재와 싸우는 데 일생을 보낸다. 지금의 많은 예술들이 현재의 의미를 찾고자 거대 서사와는 거리를 두고 사소한 것에 머무르거나, 과거와 미래에 연연해하지 않는 소박한 행복을 발견하는 데 종용하는 것은, 또 그렇지 못해 신경쇠약에 시달리거나 신경증에 걸린 존재가 과거의 영웅을 대체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러나 전시는 우리가 그런 세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다. 현재의 존재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이미 과거를 극복해낸 주체들이며, 이미 미래에 맞서있다. 지금의 인간이, 어느 순간에 우리의 시간이 과거와 미래에 걸터있다는 것을 망각하거나 포기했다 하더라도 예술은 그것보다 먼저 가 시간에 대적하려 한다. 인간이 재발명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직 남아있는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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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노트에 구나는 전시가 방황의 과정을 드러내도록 했다고 적는다. 방황이 부정적인 것으로 다뤄지는 세태에서 그는 “우리의 방황들이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섞여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두 명제를 떠올렸다. 톨킨은 1954년에 “방황하는 자가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1973년에 라캉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적어도 『너와나와너와나』 이후라면 우리는 이 명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현재’에 머무는, 정지의 순간에 고착된 존재는 태양이 자글자글 끓다가 사라질 것임을, 산맥이 물러 대지와 공평한 높이가 될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매번의 목격은 매번 다름을 반복하는 것”(작업 노트)임을 알지 못한다. 그는 시대와 사물들이 녹아 내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오해는 ‘현재’라는 시간에 납치된 감각이 인간을 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적하는 자는 속지 않는 자가 될 것이고 이 때문에 방황할 것이다. 시대와 사물이 녹아내린다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언가 배워야만 하고 현재와 싸우는 것을 통해 미래를 직접 걸어야만 한다. 전시에는 인간 이전—이후—의 인간을 보는, 시간 이후—이전—의 시간을 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구나가 모든 “타자와 주체 사이의 틈을 열어 서로의 불완전함을 매번 목격하는” 것이 “여는 구조”(작업 노트)를 위함이라고 했을 때 나 역시 그 불완전함에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섞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때 그 불완전함은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고정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는 불완전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말대로 닫힌 구조를 연다.

마지막으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있다. “누가 믿을 것인가! 사람들 말로는 시간에 격분하여 새 여호수아들이 모든 시계탑 밑에서 그날을 정지시키기 위해 시계판에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 이 문장은 7월 혁명의 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이 문장을 쓴 이유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항을 만드려는 시도를 부인하기 위해서였다. 과거가 아닌, 미래는 더더욱 아닌, 메시아가 현현하고 있는 현재에 정지시켜 사유하고 실천하기 위해 새 여호수아들은 시계판에 총을 쏜다. 그러나 오늘이 혁명의 날이 아니라면, 메시아가 현현하지 않은 시간이라면, 정지된 시침은 다시 발생의 장으로 되돌려져야만 한다. 심지어 혁명의 날에도 혁명은 도래해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니 ’오늘’만을 아는 시간에 대적해야만 한다. ‘현재’의 시간에 격분하여 새 여호수아들은 모든 시계탑 밑에서 지금을 따돌리기 위해 시계판에 총을 쏘아야 할 것이다. 그것으로 시침은 움직일 터이다. / 조재연

-이 글은 “서울문화재단 예술작품지원 평가” 를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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