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드스톤갤러리 서울, 미국 미디어아티스트 이안 쳉 개인전
이안 쳉(Ian Cheng)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가상 세계를 창조한다. ‘라이브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관객의 움직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AI가 내러티브를 직접 연출하는 미디어아트를 선보여 왔다. 그가 개인전 <Thousand Lives>(2. 23~4. 13 글래드스톤갤러리 서울)를 열었다. 사람의 사고방식을 학습, 재현하는 AI 거북이 ‘사우전드’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는다.
— 2022년 리움미술관 개인전 <세계건설> 이후 2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Cheng 신작 구상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관객의 움직임에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싶었다. <Life after BOB>(2021)에는 ‘세계 관람(Worldwatching)’이라는 모드가 있다. 이 상태가 활성화되면 감상자는 자유롭게 장면을 옮기고, 화면을 확대할 수 있다. 신작 <Thousand Lives>(2023~24)에는 이 모드를 업그레이드했다. 작품은 고정된 영상처럼 보이지만, 시청자의 시점에 맞춰 실시간 변화한다. 동물원이나 수족관에서 살아있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몰입화된 경험을 의도했다.
— 이번 개인전 <Thousand Lives>에는 당신의 시그니처 캐릭터 ‘BOB’ 대신 ‘사우전드’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 거북이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나.
Cheng <Life after BOB>의 세계관을 확장하면서도, 템포가 빨랐던 이전 작품과 다르게 감상자가 천천히 작품에 빠져드는 서사를 만들고 싶었다. 사우전드는 전작의 주인공 챌리스가 기르는 반려 거북이다. 주워 먹을 부스러기나 따뜻한 곳을 찾는 거북이의 삶은 하찮아 보이지만, 사우전드의 관점에서 보면 거대한 인간의 발을 피하는 등 스펙터클한 드라마로 가득 차 있다. 인공 지능을 지닌 사우전드는 생존을 위해 주변 공간과 사물을 학습하고, 그때그때 변화하는 상황과 감상자의 시점에 맞춰 행동을 바꾼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우전드의 기나긴 인생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게 목표다.
— 2D와 3D를 혼합한 카툰 렌더링, 짙고 어두운 컬러 스케일 등은 작업 전반에 나타나는 미감이다. 시각적으로는 어떤 특징을 고려하는가.
Cheng 디지털아트에선 색을 쓴다고 비용이 드는 게 아니니 컬러를 남용하기 쉽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중해야 한다. 가상 세계에 작품을 펼치는 만큼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색을 사용하고 싶었다. 작품에 채도가 높은 강렬한 색상을 입혀온 이유다. 한편으로 디지털아트는 이미지에만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스크린에 이미지를 띄운다고 그대로 디지털아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구성한 시스템을 통해 역동적인 흐름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디지털아트가 탄생한다.
— 당신의 작품은 ‘라이브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제작된다. 초깃값을 설정하면 그 이후엔 작품 스스로 자유롭게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시스템이다. 일반적으로 AI를 사용하는 예술가와 프로그래머는 원하는 결괏값을 내기 위해 프로그램을 통제하지만, 당신은 그 반대다.
Cheng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AI 프로그램을 통해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콘텐츠에 AI 에이전트를 풀어놓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어떻게 인공 생명을 창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쫓아왔다. AI 에이전트는 스스로 자아를 형성하는 가상의 캐릭터다.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하기 위해 학습하고, 살고 있는 세상을 모델링하며, 내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
— 학부에서 인지 과학을 전공했다. 예술과 관련이 높은 분야는 아닌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을까.
Cheng 나는 내가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흔히 예술은 배고픈 일이라고 하지만,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설계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야다.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주는 상사가 없지 않나.(웃음) 많은 청년이 직업을 선택할 때 돈과 가치가 별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얘기해 주고 싶다. 나는 커리어 초기, 아티스트의 어시스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 과정이 결국 나만의 예술을 추구하는 데 풍성함을 더했다.
— ‘도전’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화두인 것 같다. 돌연 예술가를 선택할 때도 그랬고, 작업 안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Cheng 그래픽디자이너였던 부모님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그들은 공부와 예술 사이에서 나의 선택을 늘 존중해 줬다. 어머니는 항상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응원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는 행복이 아니라 도전을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다. 행복은 쾌락에 불과하다. 반대로 도전은 인생의 이유다. 항상 ‘나답게’ 살려고 노력한다. 처음에는 두렵고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더 강렬하게 이끌리는 꿈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 큰 울림을 주는 답변이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겠다.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Cheng 최근 ‘오포넌트시스템즈’라는 이름으로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무례한 드래곤’이라는 어린이용 제품을 개발 중이다. 프로그램 안에서 드래곤은 무언가를 만들려 골몰하는데, 이용자인 아이가 자신의 창작물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의심한다. 아이는 드래곤을 설득해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드래곤은 물론 아이도 성숙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운다. 중간중간 형제나 부모가 개입해 둘 사이를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AI가 반려동물처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 『아트인컬처』 202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