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 이상 운명에 대답할 수 없는 까닭은, 운명이 말을 걸지 않는 탓이 아니라 운명을 들을 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하여 참견하거나 설득에 나서는 일, 그도 못한다면, 원망을 가하는 일에는 여기선 도무지 돌입할 수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벌어져 버린 사태에 스스로가 맞춰지도록 가담하거나, 휩쓸려 가도록 스스로를 표류시키는 것뿐이다. 어떤 것도 정당화를 되물음하지 않으며, 그 무엇을 이해했는지에 관한 검토는 함구된다. 삶의 실패는 그 어떤 주장으로도 반박할 수 없다. 이 모두는 시장과 경제가 말이 아니라 단지 숫자만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벙어리는 그 혼자였지만 이제는 그를 제외한 일체가 벙어리가 된다. 나머지 모두는 기술이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데이터만으로 스스로를 표출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눈먼 자는 그뿐이었지만, 이제 그를 예외로 한 전부가 눈먼 자가 된다. 어떤 초월적인 것과도 단절한 이후 세계는 자신을 더 많이 중얼거리게 되었지만, 언어와 감각을 잃은 이는 말했듯 가담하는 것과 휩쓸리는 것 외의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세계엔 수數가 넘실대며 흐르고, 데이터는 싱그럽게 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작열만을 듣고 볼 실재의 사막에 도착하고 만다.
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다시 언어 안으로, 그리고 데이터가 감각할 수 없는 것에서 경험 안으로 순수하게 들어오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운명에 침묵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세계의 운행에 관하여 참견하고 설득하며 그도 아니라면 원망하는 일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효력 없는 것일지라도 그 참견과 설득, 원망들이 의미 하나 가질 수 없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책무는 다시 한번 재촉된다. 예술은 수와 데이터의 매개로부터 언어와 감각의 매개로, 세계를 번역해야만 한다. 듣지 못하는 것과 감지할 수 없는 것을 언어의 영역과 경험의 영역으로 변혁하는 일로써, 그러니까 재현되지 않는 것을 재현하는 일로써 인간을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살아내는 주체로 나서게 하는 것이 예술인 이유에서다. 그런 한에서 박현이 기획한 ⟪thedesert.xyz⟫(SeMA 창고, 20.10.22.-11.01.)는 재촉을 오직 기꺼이 떠맡는 기획이다. 박현은, 전시가 수와 데이터로 잠식된 “디지털 공간을 외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현상을 포착”한다고 적었다. 이 문장은 어렵다. 그것엔 ‘~을 바라본 ~을 포착’ 한다는 제곱된 초월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제곱된 초월은 전지적 서술자의 시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술이 지난 서술을 무릅쓰고 언어와 감각으로 다시 서술에 나선다면.
2
숫자와 기술이, 세계와 일치될수록 인간은 세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멀어진다. 무슨무슨 지수로 표칭되는 수의 오르내림 자체가 경제가 될 때, 우리가 고작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자극을 받는 이들의 표정뿐이다. 빅 데이터가 굴절 없이 여론을 비춰내거나, 오랫동안 현자들이 찾아 헤맨 보편적 의식을 발견할 때 정치나 철학은 그것의 서기가 된다. 어떤 이해도 필요 없이, 민주주의도 진리도 하청에 의해서 완결된다. 그러나 이 수와 데이터가 “출력한 ‘당신’과 실제 공간의 ‘당신’이 전혀 다른 성격의 존재로 마주하는 현상을 경험한다.” 그것은 수가 모조리의 생을 대변하지 않는 까닭이며, 옳고 그름이 여론에 달려 있지 않은 까닭이고, 보편이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까닭에 있다. ⟪thedesert.xyz⟫의 xyz는 수와 데이터로 대변되거나 환원되지 않고, 그것에 달려있지 않은 영구적인 ‘예외’들의 이름이다. 전시에 참여한 박세영, 유영진, 임지민, JAN ADRIAANS의 작업은 사막 위에서 발견한 이 예외들만을 오직 질료로 했다. 수와 데이터를 연연하지 않는 곳에서 예술이 감행되는 것은 논리 너머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지, 논리에 미달하는 선동에 미美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예술은 그렇게 결단되어야만 한다.
유영진의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기원이나 선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었던 다양한 동물 화석이 출현했던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그러나 여기 있는 것은 실재의 동물이 아닌 “필요에 의해 생겨난 임시 구조물들”의 화석이다. 그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지만, 어쩐지 더 이상 ‘필요’에 맞춰지거나 가담하지 않을 것 같다. 이들은 모두 ‘필요’라는 명령에 위반해 있다. 벽돌은 더 이상 인간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 있지 않으며, 폴리우레탄폼은 표면 아래의 균열을 채우기보다는 이제 표면 밖의 허공을 향해 자유로우려 한다. 공간을 연결하는 호스는 그것보다 공간을 제작하려 한다. 다른 사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어느 것도 필요에 종사하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같이 논리로는 규정할 수 없는 예외들이다. 개수의 셈은 동일한 유類의 경우에만 허락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산술로 표현될 수 없다. 맞춤과 가담 없이 활개 치고 술렁이는 모양은 어떤 기하幾何마저 벗어나 데이터로 규정되는 것을 회피한다. 그러나 이 예외들은 모두 화석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미래는 항상 지금이다. 이 예외들의 계보는 지금의 사막에 더욱 넘쳐댈 것이다. xyz의 가능성은 그렇게 확보된다.
무엇을 보려고 하지도 않으며 접촉마저 차단된 상태, 임지민의 ⟨무겁게 닫은 눈 그리고 닫아진 손⟩은 그렇게 읽어진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개인의 기억이 하나의 감정으로 응축하는 과정”으로 밝혔을 때, 이 응축은 바로 외부에 대한 경험과 결별하는 것으로써 이루어진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 결별한 경험이 예술이 야기하고자 하는 경험인 것은 아니다. 결별은 숫자와 기술로 환원되는 경험에 이룩되었다. 그 대신 환원되지 않는 예외 같은 경험이 여기에 내내 남는다. 동일한 유가 아니기에 셈을 허락하지 않았던 유영진의 작업과는 다르게, 임지민의 작업은 입이 보이지 않는 하관과, 결속된 손으로써 일관되므로 셈을 허락한다. 이들은 특정한 검색어의 결괏값인 것처럼, 하나의 유로서 셈에 포함될 수도 데이터화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감정’으로부터 입을 다물었는지, 손을 모으게 되었는지는 수와 데이터에 영원한 예외로 남는다. 복숭아를 대신해서 자두나무가 쓰러지듯(李代桃僵), 이 단행은 표면을 논리에 환원시키는 대신 심층을, 감정을 절대적인 지위에서 지켜낸다. 임지민의 작업은 시스템에 종속된 이후에도 어떻게 이 예외들이 보존되었는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거다.
JAN ADRIAANS의 ⟨위기의 지형도⟩에는 경제에 관한 여럿의 전문가와 전문적 지식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말장난같이 들린다. 영상에 담긴 증시가 급락한 어느 날, 뉴스는 ‘수석 비즈니스 특파원’에게 이를 분석하기를 요청한다. 이에 전문가는 답한다. “네, 오늘은 10% 급락이란 역사적인 장을 마감했습니다.” 증시는 급락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0%가 급락했기 때문이다. 이 분석이 알려주는 것은 10%라는 고작 숫자의 변화다. 이후에 어떤 여자는 시장의 예측에 대해서 묻는다. “어떻게 알 수 있죠?” 이에 전문가는 대답한다. “뭐 우리도 모르지마는, (…) 과거의 불황이 이익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 모두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추측일 것 같아요.” 이렇게, 경제를 설명함이란 벌어진 사태를 동어반복적으로 읽는 것에서 그친다. 일관되도록 ‘경제’라고 부를 수 있는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는 오직 ‘경제가 없다는 것’을 누설할 뿐이다. ⟨위기의 지형도⟩가 위기인 이유는 지형에 위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형’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인칭의 숫자와 데이터는 그저 무엇이 벌어졌는지만을 기계적으로 보여줄 뿐이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도무지 해명할 수 없다. 의미는 정보들로 환원될 수 없는 오직 인칭 아래에서만 이룩된다.
하나의 신비한 빛이 출현하고, 영상은 그 빛을 추적한다. 이 빛을 추적하는 연유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 기원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알게 된다. 답은 마천루의 87층이다. 박세영의 ⟨윈도우 리커⟩는 분명 이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하지만, 영상은 결코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다. 기원을 찾아가는 영상이라면 빛의 진행을 역행적으로 담아야 하지만, 영상이 그 진행을 순행적으로 담는 탓이다. 자막과 영상은 어울리지만, 일치하지 않는다. 역행하는 시간과 순행하는 시간이 공존하는 이 역설적 프로세스는 그 역설 때문에 모든 시간을 포획한다. 다시 말해서, ⟨윈도우 리커⟩엔 ‘모든’ 시간이 존재하게 된다. 영상의 중앙엔 마천루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풍경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고정된 시간대에 존재하는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마천루가 건조되기 이전의 과거이면서 결국 무너진 미래를 동시에 나타낸다. 무리수가 소수점 밑을 무한히 변주해 나가면서도 그것이 어떤 좌표 평면에 고정된 수라는 것은 변하지 않듯이, 수는 그 고정 때문에 시간을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데이터에는 시간을 모르는 고정된 장면만이 집적될 것이다. 수와 데이터로 환원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시간 위에서 응고되는 것과 함께 녹아내린다. 영원할 것 같은 고정된 마천루도 고작 시간 위에서는 녹아내릴 것이다. 반복되는 “하나는 흔들려야 합니다.”라는 문구의 ‘하나’를 시간으로 읽으려 한다. 그리고 이 예외로 인해 언젠가 이 사막도 그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한에서 작업이란 지속될 줄 알고자 한다.
3
박현은, 덧붙인 글에서 “전시는 물성을 가지고 있기에, ‘관람’이라는 행위로 우리 몸의 질적 변형을 유도”한다고 전하며, 관객에게 이 전시로부터 몸에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답을 요청한다. 답은 섣불리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전시와 물음으로부터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잊었던 까닭에서다. 벙어리이자 눈먼 자에게 신체가 있을 리 없다. 신체가 그저 개개인에게 부여된 수와 데이터의 집합인 한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신체라는 사실을 잊고 만다. 그러나 몸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자, 우리는 스스로에게 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시가 ‘물성’을 지녔기에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물음은, 우리의 몸이 전시와 같은 물성을 지닌 것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물성이란 위반을 통해 자유를 성취하는 것, 영원히 심층을 빼앗기지 않는 것, 오직 의미를 전유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시간 위에서 고정 없이 열려있는 것의 다름 아니다. 즉 우리는 수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몸을 가진 존재임을, 그로써 수와 데이터로 이루어진 세계에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언어와 감각에 종속시켜 서술할 수 있는 존재임을 전시 이후라면 깨닫게 된다. 자 그러면 비로소 몸을 획득한 우리는 오랫동안 떠올리기만 했던, 기분으로 느끼기만 했던 이별한 실재와 ‘잠시’ 만날 수 있다. 서걱거리던 오후를, 눅눅한 목마름을 지날 때면 이것이 무엇을 일부일지 생각했다. 해후의 질감. 이것은 또 무엇의 일부일까.
참조
박현, 「INTO THE BLACKBOX」, ⟪thedesert.xyz⟫ 리플렛, 2020
보리스 그로이스, 김수환 옮김, 『코뮤니스트 후기』, 문학과 지성사, 2017
『Gravity Effect』 Issue. 6: EULJIRO에 부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