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 비약의 건조물_이여운의 회화

이여운 ⟨스튜디오 가는 길⟩ 캔버스에 수묵 73×97cm 2011

1
물 위로 난 흰 이빨 자욱, 부풀어 오르는 비눗방울, 밤하늘의 검은 너울, 유리의 거미줄. 달빛인지 햇빛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그저 여울지 못한 창백한 조명 아래, 여윈 너의 팔과 다리를 비유할 낱말을 발음해 본다. 분명 획 하나를 제외한 모든 면에 얽힌 거대한 무게를 생략해 버린 당신은, 이 순간 가장 엷고 얇다. 나는 횡행한 없는 것들을 모아 부르고 싶어졌다가, 쉽게 ‘폐허’를 모색하는 감동에는 어떤 상투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째서 풍경의 부재는 새삼스럽게 죽어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밀려가는 것일까. ‘부재’와 ‘폐허’. 나는 이런 감정과 태도를 의미하는 단어를 조금 노려본다.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서 이 순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폐허라 말하지 않겠다. 하늘을 그리지 않아도 형상만으로 빛이 있음을 알고, 다음 장면을 볼 수 없으면서도 그림자로 시간이 줄어드는 줄 알며, 길을 그리지 않아도 문이 존재하므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맙소사 나는 무엇이든 이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2
생이란 의외로 진공 속에 있지 않은 까닭에,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은 늘 어떤 배경 위로 혹은 관계 속에서 결부된 채로만 비친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을 제곱해 나가면서 그날 어떤 색의 양말을 신었는지 결국 망각하게 만들었지만, 작품이라면 그 진공을 다시 채워 넣는다. 해가 기욺을 알리도록 흰빛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멀리서 들려오는 어떤 낡은 것이 내는 마찰음, 흔들리는 타일의 먼지 그리고 구겨진 셔츠의 주름.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본줄기만을 착실하게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작품은 어떤 틈마다 ‘탈선적 객담’을 고집스럽도록 길게 늘어놓아야 한다. 작품은 대상은 물론, 그 대상을 둘러싼 모든 것의 열매마저 달다며 알뜰히 맛보라고 권하는 무엇이다. 그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주변’은 생의 유창함과 비옥함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따라서 삶이란 외따로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눈길을 돌릴만한 풍경과 맥락 그리고 사회 속으로 튼튼한 뿌리를 내리는 기쁨이 있노라고 느끼게 한다. 풍경화가 아닌 곳에서도 대상과 함께 흔들리는 풍경이 존재하고 마는 것에는 그런 연유가 있다.

이여운 ⟨기념비-통일궁⟩ 캔버스에 수묵 97×162cm 2020

그러나 이여운이 그린 대상 뒤에는 풍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면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대상만이 존재한다는 듯, 사물과 사건의 외양을 시시콜콜 따지고 묘사하는 의욕이란 작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다른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대상의 생이 세계와 함께 흔들린다거나, 대상의 내면을 유장한 배경과 결부시켜 보는 시도는 감히 볼 수 없다. 마치 성경에서 야훼가 “아브라함!”이라고 외치자 “보십시오, 여기 있습니다.”라며 어떤 경과도 없는 답이 격발되듯, 우리는 이여운의 대상에게 어디 언제 위치하고 있는지, 대답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외려 이 ‘비약’ 사이로 모든 것은 모두 회귀하고 만다. 핀 조명으로 밝혀진 하나의 건물 외에는 전부 진공이고 여백일 그곳에, 이제껏 작품들이 풍경을 묘사해 왔던 것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것이 있으며, 보는 이라면 그것을 두고 하염없이 침잠해야 한다는 암시에 도달한다. 이 비약하는 과소 정보의 필치가 그리웠던 모든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창덕궁, 덕수궁, 적감루, 오페라 가르니에, 통일궁, 대한의원 등 이여운의 그림에는 서사와 배경이 교접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허락되지 않을 역사적인 건조물이, 서사와 배경 없이 독자적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경험도 하지 않는 것처럼 시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시간을 거쳐 틈 사이로 올라온 이끼도, 주름도, 균열도 모두 마다한 채로, 심지어 때때로 재현된 그것이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마저 부정하고는 화면에 첫 표정을 오롯이 짓는다. 건축에 동원되는 여러 부자재를 포함하는 질료들은 설계라는 형상이 주문하는 필연적인 의도의 결과물이다. 그것이 전통에 의해서 구축되든, 날씨와 토양과 같은 환경에서 비롯되든, 건축가의 개념적인 이상에서 종용되든, 건조물에 포함된 어느 것 하나 자유를 구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명령에 따르는 충실한 ‘비복婢僕’이다. 그러나 주위가 대상 곁으로부터 물러나자 그들은 명령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시간마저 처음으로 옮겨진 때에 그들은 어떤 경과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자유를 구가해왔던 것처럼 활개 친다.

이여운 ⟨창덕궁 인정전⟩ 캔버스에 수묵 73×91cm 2019

창덕궁 인정전의 처마 길이는 건조물의 재료가 목조인 까닭에, 비에 젖지 않기 위해서 조정된다. 한편 처마 끝 추녀의 기울기는 행여나 젖은 목조가 썩지 않도록 햇빛을 잘 받아들이도록 조각된다. 어떤 이는 황금비에 부합하는 그 곡선이 ‘미美’를 조성한다고 여기지만 아름다움은 명령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가 그린 ⟨창덕궁 인정전⟩(2021)에는 애초에 하늘이 존재하지 않아 그것을 젖게 할 구름 역시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 건조물은 위도와 경도를, 그러니까 장소를 갖지 않는다. 어떤 주변도 갖지 않는 그는 목적을 위한 종사와 배경에 대한 적응 없는 ‘처음’을 최초로 드러낸다. 그는 주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변을 조성해낸다. 빛이 그의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이 만들어낸 그림자로 빛이 존재함을 깨닫게 만들고, 따라서 시간이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길이 그에게 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안에 문이 있어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화면엔 없는 것뿐이지만 없는 것이 있다고, 우린 비약할 수밖에 없다.

2021년 근작 중에서 ⟨위엄의 형태⟩ 연작을 제외하면 ⟨국립대만문학관⟩, ⟨하노이 오페라하우스⟩ 등 건물의 이름을 그대로 딴 작품명에서, 작가의 발언을 확인하는 것 혹은 작품의 내용이라고 여길만한 속성을 감지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목도 화면도 어느 이야기도 담지 않은 작품은 외려 내용이 아닌 ‘형식’에 대한 독해를 경유하도록 요구해낸다.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에서 주체의 주체다움, 즉 ‘주체성’을 만드는 조건은 그에게 주어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사물을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 주변의 배경까지도 주체의 분위기에서 연역해 나가는 해석의 주도권이 그에게 있을 때 화면에서 주체는 특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성립된 주체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점이라는 것이 발견된다면, 이는 시원始原이란 시간을 상대하지는 못한다는 것에 있다. 자유로운 선택은 언제나 주어진 선택지에 대한 선택으로 마련돼 있다. 그는 어느 순간에 개입할 뿐, 그 ‘어느 순간’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여운의 작품에서 건조물은 비약으로 만들어질 사물과 배경을 스스로 만듦으로써 주체의 급진적인 전거를 확립한다.

이여운 ⟨광주우체국⟩ 캔버스에 수묵 130×162cm 2018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진실’에 관한 태도이기도 하다. 예술이 삶이 진실에 베이는 어떤 순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때 작가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과 혹은 ‘진실을 말들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것 중 하나의 미학적 태도를 선택하게 된다. 전자는 거짓과 싸우는 투쟁으로서 가치를 갖지만, 후자는 진실이 —돌아와— 거주할 구조물을 만든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건설적인 가치를 지닌다. 작품은 표현으로써 거짓과 대결할 수도 있지만, 표현으로부터 훼손될 진실을 은닉할 수도 있다. 이여운의 작품이 지니는 형식은 후자에 헌신한다. 그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그리는 것으로부터 물러나, 아름다운 모든 것을 은닉할 장소로서 건조물을 그렸다. 그의 작품 앞에선 어떤 것도 확신함 없이, 어떤 내용으로 응집되는 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로, 예감하거나 암시하는 것 사이에서 ‘비약’으로만 어떤 주제에 접근했다가, 의심하며 후퇴를 반복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이 갈등은 도달하기보다 영원히 무엇가를 통과하며 걷게 될 형식, 귀향 불과의 형식이다. 작가가 그린 무색, 무형의 길은 오로지 그런 목적지만을 설명하게 한다.

3
초상화에요. 한 채의 건물 말고는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화면을 두고 이여운은 그렇게 말했다. 한 명의 얼굴이 이다지도 획으로만 가득 찰 수 있을까. 그러나 눈과 코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보다,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건조물이 무언가를 경청할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내가 무언가를 뱉으면 인간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란 사실을 응시해 보고 있다. 그가 내게로 올 수는 없지만 그는 문을 가지고 있어 내가 그에게로 진입하는 것은 가능하다. 어떤 줄거리로부터 벗어난 몸은 처음으로 기능도 어떤 목적에 종사하는 길들임도 없이 막 태어난 표정으로, 나의 응시와 동시에 나를 주시한다. 이여운의 건물은 그것의 ‘실재’와 상관없이—혹은 그것을 거슬러— 탄생한 그대로로 화면에 그려진다. 그를 세운 역사도, 인물도, 심지어 자본마저도 잊은 채로 선명한 첫 얼굴. 어느 것에도 기탁하지 않고 원인도 배경도 없이 오롯함을 내보일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실존이 지닌 꿈이란 사실 그런 것은 아닐까. 나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홀로 몸서리쳤다. 그러니 여기에 남은 무언가는 초상일 수밖에.

참조
권희철, 「형식, 혹은 텍스트의 무의식」, 『문학동네』 94호, 문학동네, 2018, pp.1~10
신형철, 「시는 어디로 향하는가」,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pp.15~20
진은영, 「있다」,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p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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