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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자를 배반에 물들이는 배후에 대해 고백할 게 있다. 이들은 사물마저 불온한 것이라 믿게 만든다. 또 사물이란 도처에 있는 까닭에, 은폐 대신 현현하도록 종용한다면 인간을 시나브로 전락에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조근거린다. 누구도 사물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정확히 발음한다면 ‘말해진’ 것의 세계, 언어를 통해 이미 이해되고 이야기되었던 용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편안한 신발은 신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눈에 딱 맞는 안경은 그것을 쓴 채로 안경을 찾게 되듯, 용도에 복종하는 대상은 명령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그 순응을 알리바이로 이내 존재에서 멀어진다. 그러니 배후가 주선하는 일은, 그 쓰임을 사랑스럽게 이행하며 도구적 방식으로 눈앞에서 사라진 존재를 다시 꼬드겨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은폐와 부각을 둘러싼 비밀스러운 일로 세계가 결정된다. 회유로부터 우리는 머물던 처소가 아름답고 평온하기를 그만두고 불화와 반목으로 깨어나는 것을 목격한다. 이런 배반은 잠잠한 일상을 밀정이 암약하는 냉전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에 급진적이다.
부분과 차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어버린 셈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고, ‘차이’를 가진 것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여서는 안 된다. 애틋한 우리는 존중과 인정 말고는 할 것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때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부분은 부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닿는 운명을 지닌 것이고, 가치와 의미는 한시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지역 그리고 시간의 차이마저 따돌리는 보편적인 필연을 지닌 것이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오랫동안 서성이는 인간처럼 예술도 그렇게 잦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역시 이제는 ‘세상은 이렇다’고 자신 있게 얼버무리는 대신에 ‘내가 보는 세상의 부분은 이렇다’고 또박였고, 누구나 함께 앓고 있는 히스테리 대신에 스스로의 신경증을 진술하는 데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예술은 ‘어떤 것에 대한’ 예술, ‘어떤 것을 표현하는’ 예술 혹은 ‘나의・내게 예술’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부분으로 한정 짓는 선에서 정확하다고 믿는 시간을 인간과 함께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그저 ‘예술’이라고 이름 짓는 예술이 나섰을 때, 그리고 한 도시의 짧은 시간을 겨우 머물다 떠날 유한한 존재가 이 모든 부분과 유한함을 부정하고, 전 지구별에서 스스로는 어디에나 있으며 어느 때나 있다면서 어떤 수식어구와 한정어구도 소거하고 그저 ‘예술’로 나설 때, 나는 휘청했다. 샌정의 ⟪VERY ART⟫는 ‘어떤’ 예술만이 존재하려는 세상에서, 예술’만(very)’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