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차고_안민: Conscience

안민, ⟨Conscience (21수1110)⟩, 사인 플렉스지에 유채, 220×290c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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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버지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이야기,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일, 한 사람의 마음엔 한 사람 이상의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보는 일, 그리고 사랑이 죽음으로써 끝난다 해도 사랑의 주검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오래전 내가 읽은 체, 알은 체하고 눈 돌렸던 모든 장면들이 시간도 장소도 심지어 기억도 없이 살아와 끝내 희망을 선물한다. 나는 올 한 해 울지 않았기에 선물을 받는 것이겠지. 그러나 울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순응하고 타협했다는 말과 다른 점이 없지 않을까. 나의 절망을 남에게도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그것을 희망이란 그럴싸한 말로써 그저 삼킨. 어째서 눈물을 흘리지도, 엄격하지도, 책망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끝끝내 당신을 미워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나. 그러니 내가 예찬해야 할 대상은 이제 부정적인 것들이다. 더는 희망을 찾지 않으면서 그리고 이해를 찾지 않으면서 절망과 미움으로써 미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벗은 그 무서운 독을 그만 흩어버리라 하겠지만,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며, 독에 구원이 있다고 믿어보는 일에 나선다. 예술의 한편은 다시 그곳에 종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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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어쨌다구_정희영: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

정희영,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 2019, 인사미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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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윤리는 현자의 돌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윤리는 이제 어느 사태에서든 어떤 대상에서든 또 어떤 시간에서건 폭력을 증류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을 ‘악’이라 부를 수 있다고 자신 있고 대담하게 소리친다. 범죄, 테러 행위, 사회 폭동, 전쟁 그리고 그로부터 비명을 지르고 눈물짓고, 피를 흘리는 인간의 군상들…을 두고 어떻게 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냐고 그는 윽박지른다. 그러니 우리는 윤리를 논할 때 단 한 마디를 준비하면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그럼 상대도, 우리도 입을 앙다물 준비를 할 것이다. 이로써 폭력이 윤리 전반에 연역되는 것은 쉽고 진부한 일이 되었다.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것, 대화와 토론을 거치지 않는 것, 강제로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는 것, 위력으로서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혼란 속에서 종용하는 것까지. 우리는 모조리 폭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윤리가 현자의 돌을 발견했을 때, 동시에 세계에서 소실된 것은 대문자로 쓴 ‘정치’의 근원적인 원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토요일(19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 퀴어들을 비롯한 이들이 행진을, 여전히 행진을 하는 상황에서도 ‘폭력’은 너무도 쉽게 낯빛을 내밀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대가 있다면 마땅히 토론을 거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퀴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회에서 합의 없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기습적으로 연단을 향한 이에게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와 “나중에”라는 연호가 응답되었고, 육식은 폭력이라는 구호는 오히려 채식이 폭력이라고 응답된다. 대관절 윤리는 그 낯빛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차별금지와 페미니즘을 그리고 채식까지도 폭력으로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이러한 운동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소명하고, 그들이야말로 폭력이라는 것을 규명하고 지탄하는 데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운동들을 저지하는 그들의 말짓과 몸짓들은 폭력이 맞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들도 역시 폭력이다. 그런데, 폭력이 어쨌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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