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어떻게 오지_강원제: 선택되지 않은 그림

강원제, <Unselected painting>, 60x310x70cm,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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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제품으로서의 작업은 한 사람의 작가’임’을 증명하기보다는 오직 그가 작가’였음’을 증명한다. 작가는 자신을 증빙해 줄 예술이 등록된 재직 증명서도, 월급명세서도 그리고 명함조차 쉽게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 그는 작업 이후에 외부에서 스스로를 증명할 그 어떤 것도 동원할 수 없다. 작업 이후 작가는 그 어떤 것도 증명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내 소등의 시간을 맞는다. 작업은, 그것이 완성되자마자 작가를 자신이 초대한 한 명의 손님 내지 관객으로 만들고 말았다. 작품이 늘 작가보다 말이 많음은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작가’임’은 오직 생성으로서의 작업, 즉 완료되지 않은 작업으로써 증명된다. 작가의 정의가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일 때, ‘하는’이라는 현재형 시제는 이다지도 엄격한 조건을 이른다. 그래서 작가는 —그가 작가임을 유지하려는 한— 많은 시간을 작업을 완료시키려는 자기 스스로와 다투며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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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_뀨르와 타르_RRRRRRRRRRR..

⟪RRRRRRRRRRR..⟫ 전시 포스터, out_sight, 2020. (포스터 디자인: 정윤하)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슬라보예 지젝 (11.10.08. 월가점령시위에서)

11이 글의 제목은 뜨거운 감자의 <좌절 금지>의 가사 “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에서 인용했다.
우리에게는 해안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바다는 강으로 흐르지 않기에, 그것이 영영 삶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한다—못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코르크 마개로 닫힌 구원의 글귀나 형상이 있을 것인 한, 의무는 도무지 저버리지 못한다. 마지못해 해안선에 도착하는 비지 않은 병들. 비로소 그 병들을 기다린다. 그들은 각자의 무인도에 제 발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짓고 지은 것을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었냐고는 물을 수 없다. 구원은 절망의 무릎에서 올 리가 없는 까닭이다. 병 안에는, 오직 흘겨 볼 시야와 성토할 입조차 잃은 절망의 나락에서 찾은 것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는 부재하는 목격과 증언을 갈음할 유일한 증거가 담겨있다. 그렇게 그들은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서 선택할 수 없었지만, 단지 어떻게 끝날지는 선택할 수가 있었을 뿐이다. 해안선에 도달하는지 혹은 더 나아가 삶의 근처까지 도착하는지는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도달과 도착을 가지고 실패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멈추는 순간은 실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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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되는 원질_강석호, 이은주: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

강석호, 이은주 기획,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 아트스페이스3, 2020, 전시포스터

아르케로서의 물, 원자, 수數 그리고 최근의 렙톤에서 쿼크까지, 더는 분할할 수도 가감할 수도 없는 원질에 대한 발견은 끊임없이 분할되고 가감되는, 즉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않는 진실한 것을 탐색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 세계가 ‘진실’히 실재하는 것이라면 이 표면 아래 사무친 것 중에서 그 진실을 야기하는 물질이 있을 것이라는 태도는, 이제 가상에 접착된 미술에게도 받아들여진다. 가상이 아름다움을 지어내고, 그때의 아름다움이 진실한 것이라면, 가상의 표면 아래 사무친 것 중에선 마찬가지로 어떤 변치않는 원질이 있을 것이라는 것.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는 분명 소문으로만 떠돌던 원질을 가상의 끝까지 다가가 발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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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유기체로 아버지_안부: 잘-못-하다

안부, ⟪잘-못-하다⟫, 킵인터치서울,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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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수 있게 된 이는 영토 밖의 너비와 시간만큼 사투리를 배웠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는 영토를 만든 그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를 아비라고 여길 수 없었다. 이방인은 가정에서 색료 냄새 거두지 않는 곳으로 또 저울 없는 도수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생물적 아비를 부정하고 이념이라는 의붓아비를 섬기게 된 까닭이다. 이 불화로부터 구호 받기 위해서 번역자에게 사정을 해볼 수도 있고, 옛 언어를 더듬으며 교류에 나설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영토 안의 안온을 위한 것이지 사랑하던 그러나 녹아내린 것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은 그에게 건넨 녹아내린 것들을 위하여, 건너에 있는 그가 외려 ‘이방인’이 되도록 영토 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 녹은 것들은 응고될 것이고, 아비 역시 응고된 것이라면 녹아내릴 것이다. 당신은 거기 말고 여기서 아름다워라. 그렇다면 변천을 벗어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빙되는 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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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연인_허단비: 영혼의 발돋움

 

허단비, ⟨죽음 새로운 시작⟩, 130.3×162.2, oil on canva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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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절망에 비해서 아름답지 않다. 차라리 나는, 연락한다는 말보다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기대했었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보다 거절이 이미 도착했으면 했었고, 그러다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북돋움 대신 남은 것은 불행뿐이라는 선고를 기다렸을 처지였다. 그저 버티지 않고 기대기만 하면, 중력이 이끄는 대로 편히 침잠할 수 있는 그런 평화와 안온이 거기 절망에 있었다. 그것을 마다했던 것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까닭은 아니었다. 도리어 아름답지 않은 것은 희망이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증오스러운 것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패배의 순간은 대부분 추함을 소복이 담고 말기에, 그것은 그 추함으로써 희망을 반드시 떠올리게 했다. 희망이 거기에 있어 기꺼이 포기하지 못했고, 울먹이며 처분을 기다릴 기회를 약탈당하고 말았다. 적은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청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못 하고 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내겐 내내 남는다. 평화와 안온이 그득한 아름다운 절망을 쥘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외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로, 강박적으로 희망에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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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_정원석: 할아버지 시계

정원석, 『할아버지의 시계』, 별관,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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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하게와 물끄러미가 어긋나고서야 비로소,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었다. 열지 않는 서랍 속의 드물게 남는 사진처럼 사랑도 무수히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한심한 반복들을 고작 잊고선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을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영원을 부정할 그 말이 준비된 것이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는 비로소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이제까지 ‘영원’이란 낱말이 고비를 맞았던 것은 ‘영원’을 영원으로 맞이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영원은 영원을 지지하고 믿음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부정하고 의심할 때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상징을 다이아몬드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손쉽게 모든 사물에 함부로 부딪쳐 보고 떨어진 파편에 당혹감을 느끼지마는, 사랑을 대추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좀처럼 부서질 것을 알기에 감사하고 조심히 안는다. 현명한 자들과 믿음 있는 자들이 모두 틀려 사랑이 종말의 위기를 맞는다해도, 여전함으로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믿지 못해 떨고 있던 자들의 몫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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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알러지 잠수함_김학량: 바다와 나비

김학량, ⟪바다와 나비⟫ 전시 포스터, 상업화랑, 2020.2.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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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기다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세상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다음에’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럼 나는 시계 앞으로 가, 시곗바늘만 빤하게 쳐다보았다. 째깍째깍 뚝뚝 끊어지며 가는 초침보다는 친구 집에서 본 부드럽게 움직이는 초침의 시계가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집에는 그런 시계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시계를 계속 쳐다보면 그는 부끄러워서 다음 시간으로 갈 수 없을 거라고.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나이였고, 누군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평소에 눈감고 하던 것들도 실수했었기에 그가 부드럽게 침들을 옮기지 못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침이 한 바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그가 안심하고 바늘을 옮길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것은 나 같은 이가 또 있구나 하는 유형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부끄럼 많은 그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해야 하는 나를 위해서, 나는 한동안 우리 집에 누구도 초침이 한 바퀴를 도는 직전에는 시계를 보지 못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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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게 허무라니요_서찬석: 오류를 지나

서찬석, 『오류를 지나』 전시 포스터, 보안여관, 2020.2.1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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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기울이다 결국 불에 닿은 것처럼 혹은 누가 모르게 얼음을 등 뒤에 넣은 것처럼 느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따위의 말을 들을 때면.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의미에 관해 묻곤 했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화폐를 벌 수 있는지와 어느 정도의 쓸모를 가질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아주 상냥한 물음에 속한 것이었고, 좁은 내 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것 같았지만, 등은 이따금 시큰함을 느꼈다. 세상엔 생각보다 화폐를 따지는 물음만큼 의미를 따지는 이들이 존재했다. 아마도 세상을 좀 더 정숙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많은 철학자가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작가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폐와 의미는 얼마만큼이나 다를까. 한동안 의미는 화폐를 대적하는 것처럼 굴었다. 한사코, 그것도 자발적으로 초월적인 것과 단절한 우리 근대인이 화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세상의 효용으로는 따질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다시 너절한 초월적인 것들을 애끓듯 뒤적였다. 그래서 세상의 작은 여럿은 적은 화폐나 드물은 효용에도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했다. 의미는 화폐를 대적했던 것이 아니라 적은 화폐를 쥐여주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화폐가 좀처럼 부재하는 자리에 대한 알리바이를 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요한 것이지만 감히 화폐를 쥐여주기는 싫었던 세상이 알리바이처럼 건네던 것이 사실 의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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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판에 총_구나: 너와나와너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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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잠언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의심쩍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전하며 늘 오늘을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자랑스럽게 논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낱말을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죄책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요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이때 ‘시간’은 적금 만기일이 도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타임라인 혹은 타임 세일이라는 행사 속에 종사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소실하는 일은 ‘지금’이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항 사이에서 도려낼 때 야기된다. 시간은 모순적인 관계항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재를 따로 도려낼 때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는 현재를 획득하긴커녕 시간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에 연루하게 된다. 과거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이후’—80년 5월 이후나 14년 4월 이후와 같은—라는 기준점을 가지고 그러한 과거에 대한 부정과 지양이라는 관계에서 위치한다. 반면 미래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현재에 존재해야 했으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을 위한 시간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지양을 수행하는 관계에 놓인다. 결국 과거와 미래라는 항을 놓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지금의 세계가 과거와는 달랐고 또 미래에 역시 달라질 것이란 세계의 변혁 가능성을 견지하는 일이며, 존재에게는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에 믿음을 보태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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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끔 서 있어도 우리들은_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

Happy Hour, 「ruoh yp pah(어슬렁어슬렁)」, 사진출처

’세계를 바꾸려면’이란 조건절을 내달은 문장들은 지금 진부해졌다. 이 조건절을 만족시키기 위해 던졌던 물음에 이윽고 ‘세계란 없습니다’하고 수긍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긍으로부터 가장 위기에 닥뜨린 것은 존재 자체이기보단 예술일지도 모른다. 이때 예술이란 인상주의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진실한 세계란 이렇다고 호령하며 세계를 규정짓던 것이자, 과거의 세계에는 없을 수밖에 없으나 미래에 도래해야만 할 것을 당기는 것으로, ‘지금’ 세계의 불충분함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상상력을 행사하던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전체 세계가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기보다는 사소한 부분의 장소들을 종용하고 있으며, 세계에 관한 입장을 지니기보단 스스로에 대한 입장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반대로 예술이 가능하기 위해서 예술이 할 것은 세계의 부분들을 상냥하게 포착하고 위무하기보다는 스리슬쩍 소실된 세계를 다시 창설하는 일에 나서는 것 아닐까. 그런 한에서 ⟪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는 감각이 연결될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창설하는 데 모든 주의와 신경을 기울이는 기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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