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옥에서 살아요_최수련: 태평선전

최수련, ⟪태평선전⟫, 인천아트플랫폼,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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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아니라고 반하고 싶었지만, 인상착의도 그림자도 없이 체포되는 그를 보게 된다.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물을 수 없다. 찾아온 이가 들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저지르지 않은 죄와 그래서 어떤 혐의인지도 알지 못할 죄에 대해서 혐의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법정은 이 체포만큼이나 맹목적이고 불가항력이어서 소(訴)는 심판이 아닐 길이 없다. 한 치도 순결하므로, 그는 법정에 회부되었음에도 법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출입은 마냥 지연될 것이다. 법이 알려지지 않은 선에서 또 어떤 죄인지 모르는 선에서 그러니까 영원히 맹목적인 한에서만 심판은 공평한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심판이 공평한 연유는 어떤 조건도 없이, 어디도 살피지 않고 공평히 유죄만을 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은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지만 또 어느 곳에도 없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삶의 내내 선명히 있는 심판이다. 미심쩍고 유감스러운 이 법의 이름은 늘 섭리로 불렸다. 매일 새로운 소식에 포함된 무죄한 약자, 타자, 소수자 따위들의 고통도 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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