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은 숯_BGA Compliation 31.

표지 작품은 이승주 <이상한 나라> 부분크롭, 캔버스에 아크릴, 2016

예술이 곧 정치는 아닐 것이다. 붓이나 펜을 잡는 것으로 혹은 미술관의 문턱을 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이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한에서 예술이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벗어나야 하는 것은 정확히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논리다. 예술은 그 현실을 보는 다른 논리, 다른 시선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삶과 연결됨으로써 정치적이게 된다. 정치가 다른 삶을 발명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리는 미술이 어떻게 정치의 개념을 건네는지, 어떤 식으로 정치를 미술에서 읽어낼 수 있는지를 볼 것이다. / 조재연

7/6 「행복은 절규」_이승주, ⟨이상한 나라⟩
7/7 「속세는 숭고」_이우성, ⟨당신은 왜 산에 오르십니까?⟩
7/8 「권능은 역량」_우정수, ⟨캄 더 스톰⟩
7/9 「중심은 주변」_최요한, ⟨Q_Fungi⟩
7/10 「블루는 화이트」_방성욱, ⟨Green Collar Workers⟩

(미술 구독 서비스 “BGA 백그라운드아트웍스”에서 계속)

제거할 수 없는 자리, 자본의 대립항 노동_메이데이에 부침 출처

노동이 유쾌한 적은 대부분 없었던 것 같지만, 오늘날에 그것은 어느 시기보다 불안정하거나, 심각하고 폭력적인 격무 위에 올려져 있거나, 박탈당해진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모두가 자본주의는 ‘아니다’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날 드문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운동가의 입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틈틈이 자선기관이나 인도주의기관에 의해서 고발되며 마침내 교황의 입에서도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고통들이 다큐이든 아포리즘이든 대체할 수 없는 정확한 묘사에 의해서 우리의 개탄이나 눈물을 지어낸다고 해서 그것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회피할 수 없는 물음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의 정치가 자본에 반하거나, 거스를 수 있을까’라고 하는 형태일 것이다. 우리는 지체 없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정치를 떠올릴 수 있지만 91년을 전후로 제거할 수 없는 자리, 자본의 대립항 노동_메이데이에 부침 출처 더보기

다시 한 번, 전체에 대하여; 영화 <당통(Danton), 1983>

지난 12월 10일 서울시는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를 결정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시민위원회를 결성해 수차례의 회의를 모았고, 인권헌장의 내용 역시 특이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부터의 연역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권헌장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소통·합의의 부재의 반증으로 이해한 것에서 발생했다. 민주주의의 정치란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하는 정치이기에 반대가 격렬하다면 그것은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추진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했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므로 재고하여 충분한 소통과 합의를 거쳐야한다는 주장은 그자체로 민주적이면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 찝찝한 일이고 분통스런 느낌 또한 제공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영화 <당통>이 표상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시 한 번, 전체에 대하여; 영화 <당통(Danton), 1983>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