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로서의 예술가
2017.11. 07. ~ 11. 17.
경의선공유지미술관 M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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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쁘다,
지금만큼 많은 시, 소설, 전시 그리고 공연이 어디서나 흘러 넘치던 시절이 있었을까. 그리고 상품마저 예술이기를 소망해 시장이 갤러리가 될 때,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움이 창궐하는 시대가 된다. 이미 충분한 ‘시’가 쓰여지고 충분한 노래가 불러진 그 후에도, ‘다음’의 시가 쓰이고 ‘다음’의 노래가 불린다. 여전히 ‘다음’이 있는 이유는 아름다움이 넘쳐나듯이 화폐가 유례없이 흐르는 까닭이거나, 아름다움이 창궐하는 세계가 곧 아름다운 세계는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예술의 몫이 아니고, ‘세계’라는 낱말은 지금의 예술이 기억할 단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미적인 생산을 하는 것’이 ‘세계의 미(美)에 헌신하는 것’과 언제나 다르지 않았던 세기를 소환함은, 끝났다고 생각한 결산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은 세계를 상대로 좀처럼 거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여전히 ‘세계’는 예술을 상대로 대립하고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예술은 다시 전선(戰線)에 선채로 결산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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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들의 ‘세계’를 응시하는 것보다, 존재자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은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세계’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과 세계 이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또다시 전체주의로 전락할 수 있으니, 전체 같은 이야기는 하지말고 애틋한 ‘부분’들을 돌아보자는 것. 지난 세기, 세계 전체를 응시하는 정치의 모든 이름이 ‘혁명’었다면 아마도 혁명이란 단어는 그 끄트머리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폐기는 곧 세계 자체를 문제시 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공허한 정치만을 남긴다. 세계는 매일 매일 변화한다. 바뀌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세계 그 자체다. 이제는 돌아와 전선 앞에 선 예술은 ‘세계’와 ’혁명’을 발음할 줄 모르는 정치 대신에 다시 혁명을 지껄여야 한다. 예술가는 투쟁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투쟁은 응당 작업실을 초과하는 활동이 된다. 시위, 노조, 정당, 직업 정치인 그리고 혁명가. 예술의 고유한 몫은 가능한 차선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최선을 지향하는 데 있으므로, 넘쳐나는 아름다움에 침전하는 것 대신 세계와 투쟁하기로 한 예술가는 예술의 최대치로서 작업을 초과해 직접 정치에 그리고 마침내 혁명에 참여해야만 한다.
소환된 작가들은 모두 그 최대치에 도달했던 이들이다. 그들의 투쟁은 예술의 외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예술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 그 몫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계와의 투쟁은 작가의 작업과 반드시 동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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