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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잠언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의심쩍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전하며 늘 오늘을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자랑스럽게 논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낱말을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죄책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요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이때 ‘시간’은 적금 만기일이 도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타임라인 혹은 타임 세일이라는 행사 속에 종사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소실하는 일은 ‘지금’이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항 사이에서 도려낼 때 야기된다. 시간은 모순적인 관계항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재를 따로 도려낼 때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는 현재를 획득하긴커녕 시간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에 연루하게 된다. 과거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이후’—80년 5월 이후나 14년 4월 이후와 같은—라는 기준점을 가지고 그러한 과거에 대한 부정과 지양이라는 관계에서 위치한다. 반면 미래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현재에 존재해야 했으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을 위한 시간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지양을 수행하는 관계에 놓인다. 결국 과거와 미래라는 항을 놓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지금의 세계가 과거와는 달랐고 또 미래에 역시 달라질 것이란 세계의 변혁 가능성을 견지하는 일이며, 존재에게는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에 믿음을 보태는 일이기도 하다.
[태그:] 전시
제가끔 서 있어도 우리들은_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
’세계를 바꾸려면’이란 조건절을 내달은 문장들은 지금 진부해졌다. 이 조건절을 만족시키기 위해 던졌던 물음에 이윽고 ‘세계란 없습니다’하고 수긍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긍으로부터 가장 위기에 닥뜨린 것은 존재 자체이기보단 예술일지도 모른다. 이때 예술이란 인상주의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진실한 세계란 이렇다고 호령하며 세계를 규정짓던 것이자, 과거의 세계에는 없을 수밖에 없으나 미래에 도래해야만 할 것을 당기는 것으로, ‘지금’ 세계의 불충분함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상상력을 행사하던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전체 세계가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기보다는 사소한 부분의 장소들을 종용하고 있으며, 세계에 관한 입장을 지니기보단 스스로에 대한 입장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반대로 예술이 가능하기 위해서 예술이 할 것은 세계의 부분들을 상냥하게 포착하고 위무하기보다는 스리슬쩍 소실된 세계를 다시 창설하는 일에 나서는 것 아닐까. 그런 한에서 ⟪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는 감각이 연결될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창설하는 데 모든 주의와 신경을 기울이는 기획이 된다.
사뭇 지속하는 다툼_송가현: 이스트빌리지 뉴욕:취약하고 극단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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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하지는 말자, 우리가 뒤샹 이후를 살아간다 하더라도. 또 모든 이들이 예술가라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때에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스펙터클뿐이다. 주방장은 쉐프로, 커피를 뽑는 자는 바리스타로, 이발사는 바버로 이윽고 시간제 노동자를 크루라고 부르게 될 때 사회는 집요하게 노동을 우아한 예술로 점철시키는 욕정을 드러낸다. 노동은 자신을 주입하면서 상품을 만들고 스스로는 가리어지게 되지만, 예술이 작품을 만들 때 그의 생산자는 존재를 유지한다. 상품은 그것을 누가 어떤 의도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는지에 대한 물음들을 드물게만 허락하지만, 예술에게 그 물음들은 우연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노동과 예술 더불어 상품과 작품의 근원적인 차이였다면 사회는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아방가르드의 오래된 소원을 부정적으로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폭력이 어쨌다구_정희영: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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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윤리는 현자의 돌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윤리는 이제 어느 사태에서든 어떤 대상에서든 또 어떤 시간에서건 폭력을 증류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을 ‘악’이라 부를 수 있다고 자신 있고 대담하게 소리친다. 범죄, 테러 행위, 사회 폭동, 전쟁 그리고 그로부터 비명을 지르고 눈물짓고, 피를 흘리는 인간의 군상들…을 두고 어떻게 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냐고 그는 윽박지른다. 그러니 우리는 윤리를 논할 때 단 한 마디를 준비하면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그럼 상대도, 우리도 입을 앙다물 준비를 할 것이다. 이로써 폭력이 윤리 전반에 연역되는 것은 쉽고 진부한 일이 되었다.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것, 대화와 토론을 거치지 않는 것, 강제로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는 것, 위력으로서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혼란 속에서 종용하는 것까지. 우리는 모조리 폭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윤리가 현자의 돌을 발견했을 때, 동시에 세계에서 소실된 것은 대문자로 쓴 ‘정치’의 근원적인 원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토요일(19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 퀴어들을 비롯한 이들이 행진을, 여전히 행진을 하는 상황에서도 ‘폭력’은 너무도 쉽게 낯빛을 내밀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대가 있다면 마땅히 토론을 거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퀴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회에서 합의 없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기습적으로 연단을 향한 이에게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와 “나중에”라는 연호가 응답되었고, 육식은 폭력이라는 구호는 오히려 채식이 폭력이라고 응답된다. 대관절 윤리는 그 낯빛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차별금지와 페미니즘을 그리고 채식까지도 폭력으로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이러한 운동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소명하고, 그들이야말로 폭력이라는 것을 규명하고 지탄하는 데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운동들을 저지하는 그들의 말짓과 몸짓들은 폭력이 맞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들도 역시 폭력이다. 그런데, 폭력이 어쨌다구.
세계여, 이것은 당신을 위한 종말 2_손배영: 사소한 완강함을 위한 쇼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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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이도 사랑받은 이도 결국 파멸로 끝을 맺는, 구원이라고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비제의 <카르멘>에서 니체는 완전하게 구원된 무언가를 찾아내 소리 낸다. 그것은 다른 모든 인물들이 파멸했기에 오히려 구원될 수 있었던 혹은 파멸로부터 달성된 자연적 사랑이다. “결국에는 사랑을, 자연으로 다시 옮겨진 사랑을! ‘고결한 처녀’의 사랑이 아니고! 센타의 감상도 아닌! (…) 바로 그래서 그 사랑에는 자연이 깃들어 있는 겁니다.”(『바그너의 경우』) 인간이 진행하는 사랑보다 인간의 주검 뒤에 의미만이 남은 사랑은, 그리고 의미보다 ‘자연’이 강조된 사랑에서 이러한 증명은 반드시 인간으로 구성된 주체의 역사에서 주체인 인간을 패퇴시키고, 자연(적 사랑)이란 주체의 입회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란 주체에 종속된 ‘사랑’은 비로소 …의 사랑이란 소유격을 벗어나 오롯한 의미를 되찾으며 그로부터 자연은 소생한다. 그렇게 실천에서 주체가 해소될 때, 의미는 강조되며 억압되었던 것은 부활하거나 회생回生한다.
세계여, 이것은 당신을 위한 종말_이윤희, 손배영, 최은: 골목유랑기
“모든 이들이 깊은 마음 속에선 세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1Q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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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을 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리고 과거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결점들 그리고 오점들을, 인정하고 삼킬 것을 각오하고 선언했다. “내가 잘할게.” 당신의 오래고 먼 연락을 기다릴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변덕에 호응하고 독과 같은 말을 참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초과할 아직은 빈칸의 어떤 것. 그것을 담보로 비었던 사랑을 잠시간 빚져 온대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게 될 것이다. 그때의 우리는 사랑에 부족한 것이 있어 그것을 채움으로 존속되거나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 자체가 없었음을. 사랑의 양태, 형상, 질료와 같은 것들이 변질된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이별을 짓는 것은 ‘사랑 아님’의 어떤 것임을.
아도르노가 2차 세계대전 속에서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계몽의 변증법」, 1944, 서문)라고 물을 때 그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우리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사이를 이간질 시킨 것을 이성과 그것의 여정이었던 계몽으로 지목하고 철학이 조금 더 해석에 나서야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내가 잘할게”로 들린다. 그러나 그의 비관적인 이 근심은 어쩌면 끝끝내 낙관적이었다.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해왔던 성찰들과 더 나은 세계를 창립하고자 했던 실천들은 사실 전체와 동일성 아래 개별적인 것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폭력이었다는 것. 그렇게 모든 혁명은 전체주의로 끝났음을 마주하고도 그는 끝내 이별을 짓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아냈다. 이별을 짓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벤야민도, 사르트르도 그리고 아렌트조차도. 아마도 철학은 거기에 힘이 있을 것이다.
어떤 가능성에 대한 끈질긴 사랑_하므음: 둘, 셋의 공통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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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의 선물을 고르다 망설였다. 나는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도통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옷의 대부분이 검은색이고, 그렇지만 꽃을 고를 때는 파스텔톤을 선호하고. 코코아를 좋아하지만 정작 쓰고 달지 않은 코코아를 찾는 당신까지는 내가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와 느낌 앞에서 나는 한참이 모호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검은색이 어떤 위안을 주는지 몰랐고, 파스텔 톤이 당신을 어떻게 물들이는지, 그런 코코아에 심심함 말고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느낄 수 없었으니까. 모호하지만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모호 속에서도 사랑은 지속될 수 있을까.
환상은 삶을 짓는 자 편에_백은하: 기억의 활용(상상과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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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실재의 반의어로 사용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실재를 위협하거나 적대하는 것만을 수행하지 않고, 실재에 의해 폭로된 이후에 말소되지 않는다. 살아가는 이라면 그가 걷는 동안 환상은 그의 한 편을 부축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거나 ‘정의로운 대한민국’과 같은 믿음은 지난 십년 동안 보탬이 되지 않는 환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여전히 선한 사람이 존재한다거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그것이 마음껏 환상임을 지적해 조롱한다고해도 멈춘 걸음을 재촉하고 부축했다. 또 비단 이러한 거대한 환상만이 존재를 버티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지극히 소박하거나 개인적인 환상이 존재를 지탱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할 거야’라거나 누군가와 늘 함께 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 혹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까지. 감히 환상이라고 부르기 무서운 이 가상들은 어느 한 번 증명조차 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 없이 우리의 삶은 실재를 버틸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마담의 주방》 2017.12.07.-2018.01.14.
마담의 주방
2017.12.07-01.14
대안공간 눈 제1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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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레지던시에서 그때 마담은 뭐든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맞았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그녀는 작업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가 작업에 대해서 말할 때면, 그녀는 꼭 나의 평소를 언급했다. 다음 전시에 일본인이 올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이름이 일본어의 어떤 발음과 겹치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거나,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현지인들이 보기에 무섭게 느껴질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꼭 작업에 관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늘 예술가인 사람이거나, 늘 동류인 예술가인 듯 했다. 그 맥락 위에서 나의 평소는 혹은 거창하게 삶은 작업의 과정 안에 대등하게 있거나 완성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 늘 진행 중인 전개의 형식을 유지했다. 어쩐지. 그때 마담은 뭐든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맞았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작업의 출처가 내 일상이라는 것, 내 작업은 그때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된다는 것을 그녀는 주방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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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것의 함유성에 대한 타자로서 외부에 존재한다. 환락(歡樂)의 대상인 예술을 일상과 일치시킬 때 그것은 도구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해방의 창구로서 기능한다. 모더니즘 미학이 예술에 희망을 걸며 가망 없는 헌신을 하려는 바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앞의 이 두 문장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하나이자 곧 전체일 ‘상품’은 우리에게 오직 결과로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방식을 통해서 생산 되었는지 중요하지 않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직 가격만을 가진 채 결과만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나 예술엔 늘 ‘과정’의 물음이 끈적이게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것이 담보하는 비평의 가능성은 곧 ‘비판’의 가능성으로 세계를 위협하고 긴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상품에 대한 리뷰는 창궐하지만 예술에 대한 비평이 빈곤함은 그 자체로 비평의 위기를 넘어서 예술의 위기이자 변혁의 위기일 것이다. 이 위기를 유예시키기 위해서 예술은 비평을 담보했던 ‘과정’을 보존해야한다. 약정된 작업실에서 일상으로, 완결된 작품이 아닌 태동하고 전개하는 작업으로. 그건 예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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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존재의 집》 2017.12.07.-2018.01.14.
취향은 존재의 집
2017.12. 07. ~ 2018. 01. 14
대안공간 눈
“이해”란 해석학적으로 공통-보편이라고 할 만한-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 반대로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이기만한 일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취향존중, 줄여서 “취존”이란 낱말의 쓰임새는 그 개인적이기만한 일을 이해해달라는 요청임에도, 그자체로 그것은 모순을 갖게되는 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 즉 취향과 공통의 지평이라 칭해지는 이해는 서로를 늘 포함하지 않는다. 그래서 “취존”은 그것이 내뱉어질 때마다 상대의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쉽게도 방치해왔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취향이라면 더 이상 상대를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취향은 그래서 존재가 가장 혼자여야 하는 시간이며, 아무도 같이 있을 수 없는 때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이라면, 그리고 그 믿음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는 가장 개인적이기만한 일들에서도 공통의 지평을 찾는 일에 종사해야만 한다. 기획된 전시들이 모두 경유하는 지점은 그렇게 취향에서 공통의 지평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리고 가장 개인적인 것을 공통의 지평에 위치시키는 것은 가장 고유한 예술의 몫이다. “저 그림은 아름답다.”라고 일컬어질 때, 그것은 내게만 아름답다는 말로 풀이되지 않는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판단’임에도 표현을한 예술가의 취향도, 받아들이는 ‘나’의 취향도 그것이 모두에게 아름답길 염원한다. 사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가장 오랜 믿음을 가지고 헌신했던 것은 예술일지도 모른다.
취향은 가장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장소는 늘 사회에 놓여져있고, 그것의 문을 연다면 그 사회 그러니까 공통의 지평과 마주할 수 있다. 가장 혼자여야 하는 시간이 있다. 아무도 같이 있을 수 없는 ‘나’일 때가 있다. 전시는 그 문을 열고 이음을 만들고자 한다.
그 순간에도.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