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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아니라고 반하고 싶었지만, 인상착의도 그림자도 없이 체포되는 그를 보게 된다.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물을 수 없다. 찾아온 이가 들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저지르지 않은 죄와 그래서 어떤 혐의인지도 알지 못할 죄에 대해서 혐의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법정은 이 체포만큼이나 맹목적이고 불가항력이어서 소(訴)는 심판이 아닐 길이 없다. 한 치도 순결하므로, 그는 법정에 회부되었음에도 법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출입은 마냥 지연될 것이다. 법이 알려지지 않은 선에서 또 어떤 죄인지 모르는 선에서 그러니까 영원히 맹목적인 한에서만 심판은 공평한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심판이 공평한 연유는 어떤 조건도 없이, 어디도 살피지 않고 공평히 유죄만을 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은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지만 또 어느 곳에도 없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삶의 내내 선명히 있는 심판이다. 미심쩍고 유감스러운 이 법의 이름은 늘 섭리로 불렸다. 매일 새로운 소식에 포함된 무죄한 약자, 타자, 소수자 따위들의 고통도 늘 그런 것이다.
[태그:] 전시
미적 유기체로 아버지_안부: 잘-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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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수 있게 된 이는 영토 밖의 너비와 시간만큼 사투리를 배웠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는 영토를 만든 그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를 아비라고 여길 수 없었다. 이방인은 가정에서 색료 냄새 거두지 않는 곳으로 또 저울 없는 도수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생물적 아비를 부정하고 이념이라는 의붓아비를 섬기게 된 까닭이다. 이 불화로부터 구호 받기 위해서 번역자에게 사정을 해볼 수도 있고, 옛 언어를 더듬으며 교류에 나설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영토 안의 안온을 위한 것이지 사랑하던 그러나 녹아내린 것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은 그에게 건넨 녹아내린 것들을 위하여, 건너에 있는 그가 외려 ‘이방인’이 되도록 영토 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 녹은 것들은 응고될 것이고, 아비 역시 응고된 것이라면 녹아내릴 것이다. 당신은 거기 말고 여기서 아름다워라. 그렇다면 변천을 벗어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빙되는 것이어라.
폐허의 연인_허단비: 영혼의 발돋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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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절망에 비해서 아름답지 않다. 차라리 나는, 연락한다는 말보다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기대했었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보다 거절이 이미 도착했으면 했었고, 그러다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북돋움 대신 남은 것은 불행뿐이라는 선고를 기다렸을 처지였다. 그저 버티지 않고 기대기만 하면, 중력이 이끄는 대로 편히 침잠할 수 있는 그런 평화와 안온이 거기 절망에 있었다. 그것을 마다했던 것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까닭은 아니었다. 도리어 아름답지 않은 것은 희망이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증오스러운 것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패배의 순간은 대부분 추함을 소복이 담고 말기에, 그것은 그 추함으로써 희망을 반드시 떠올리게 했다. 희망이 거기에 있어 기꺼이 포기하지 못했고, 울먹이며 처분을 기다릴 기회를 약탈당하고 말았다. 적은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청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못 하고 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내겐 내내 남는다. 평화와 안온이 그득한 아름다운 절망을 쥘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외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로, 강박적으로 희망에 진다.
기억을 딛고 얻은 망각_남지연: Story(story)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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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내내 났지만, 아침 안개가 그것을 머금곤 해가 뜨자마자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괜히 타고난 자리, 지글지글 끓던 곳을 정말 다 타버렸을까 보았을 때 그 자리엔 그을음조차 없었지만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통해서야 기억할 수 있던 것이었고, 기어코 사진조차 없이도 선연히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가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날 밤, 나는 어렴풋한 것들을 내어준 대신에 지울 수 없는 것들을 새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게 망각만이 내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파열의 발견만이 내가 어디서 온 이가 아니라,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이임을 알려주었다.
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_김학량: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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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자- 변신이다_임동승: TRANS
비록 얼어붙고 고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간에 존재를 흘려보내려는 것이 또 공간으로 발하려 하는 것이 있다. 동그라미가 ‘평면 위의 한 점에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점들의 집합’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시간도 공간도 갖지 않은 셈이지만, ‘일정점을 원점으로 하여 평면상을 회전하는 폐곡선’을 뜻한다면 그것은 어느새 시공간 안을 흐르고 차지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머리가 꼬리를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식별이 불가능하도록 빠르게 회전하는 까닭이다. 비명도 발작도 없이 정지된 평면만이 강조된 것이 그림의 본질이나 운명이라고 전하는 것은, 임동승이 말한 “영화적인 면모, 강점이 회화의 영역에서 비본질적이고 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기”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운명을 거스르는 것과 따르는 것이란 양자의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은 과녁을 빗나간다. “무엇을 그려야 하고 무엇을 그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누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할 수가 없어졌다. 정지의 결정이 발생을 가능하게 만들고, 발생을 결정한 곳에서 정지가 증식된다. 그러니 그리는 자가 이제 해야 할 것은 그것에 “항상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 이후에 나서는 것이다. 임동승의 《TRANS》는 어느 입장을 선택하든지, 결국 반대의 선택의 책무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 조재연
0章_샌정: VERY ART
부분과 차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어버린 셈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고, ‘차이’를 가진 것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여서는 안 된다. 애틋한 우리는 존중과 인정 말고는 할 것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때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부분은 부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닿는 운명을 지닌 것이고, 가치와 의미는 한시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지역 그리고 시간의 차이마저 따돌리는 보편적인 필연을 지닌 것이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오랫동안 서성이는 인간처럼 예술도 그렇게 잦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역시 이제는 ‘세상은 이렇다’고 자신 있게 얼버무리는 대신에 ‘내가 보는 세상의 부분은 이렇다’고 또박였고, 누구나 함께 앓고 있는 히스테리 대신에 스스로의 신경증을 진술하는 데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예술은 ‘어떤 것에 대한’ 예술, ‘어떤 것을 표현하는’ 예술 혹은 ‘나의・내게 예술’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부분으로 한정 짓는 선에서 정확하다고 믿는 시간을 인간과 함께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그저 ‘예술’이라고 이름 짓는 예술이 나섰을 때, 그리고 한 도시의 짧은 시간을 겨우 머물다 떠날 유한한 존재가 이 모든 부분과 유한함을 부정하고, 전 지구별에서 스스로는 어디에나 있으며 어느 때나 있다면서 어떤 수식어구와 한정어구도 소거하고 그저 ‘예술’로 나설 때, 나는 휘청했다. 샌정의 ⟪VERY ART⟫는 ‘어떤’ 예술만이 존재하려는 세상에서, 예술’만(very)’이려 한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_정원석: 할아버지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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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하게와 물끄러미가 어긋나고서야 비로소,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었다. 열지 않는 서랍 속의 드물게 남는 사진처럼 사랑도 무수히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한심한 반복들을 고작 잊고선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을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영원을 부정할 그 말이 준비된 것이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는 비로소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이제까지 ‘영원’이란 낱말이 고비를 맞았던 것은 ‘영원’을 영원으로 맞이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영원은 영원을 지지하고 믿음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부정하고 의심할 때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상징을 다이아몬드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손쉽게 모든 사물에 함부로 부딪쳐 보고 떨어진 파편에 당혹감을 느끼지마는, 사랑을 대추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좀처럼 부서질 것을 알기에 감사하고 조심히 안는다. 현명한 자들과 믿음 있는 자들이 모두 틀려 사랑이 종말의 위기를 맞는다해도, 여전함으로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믿지 못해 떨고 있던 자들의 몫 때문일 것이다.
바다 알러지 잠수함_김학량: 바다와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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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기다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세상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다음에’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럼 나는 시계 앞으로 가, 시곗바늘만 빤하게 쳐다보았다. 째깍째깍 뚝뚝 끊어지며 가는 초침보다는 친구 집에서 본 부드럽게 움직이는 초침의 시계가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집에는 그런 시계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시계를 계속 쳐다보면 그는 부끄러워서 다음 시간으로 갈 수 없을 거라고.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나이였고, 누군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평소에 눈감고 하던 것들도 실수했었기에 그가 부드럽게 침들을 옮기지 못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침이 한 바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그가 안심하고 바늘을 옮길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것은 나 같은 이가 또 있구나 하는 유형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부끄럼 많은 그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해야 하는 나를 위해서, 나는 한동안 우리 집에 누구도 초침이 한 바퀴를 도는 직전에는 시계를 보지 못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주신 게 허무라니요_서찬석: 오류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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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기울이다 결국 불에 닿은 것처럼 혹은 누가 모르게 얼음을 등 뒤에 넣은 것처럼 느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따위의 말을 들을 때면.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의미에 관해 묻곤 했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화폐를 벌 수 있는지와 어느 정도의 쓸모를 가질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아주 상냥한 물음에 속한 것이었고, 좁은 내 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것 같았지만, 등은 이따금 시큰함을 느꼈다. 세상엔 생각보다 화폐를 따지는 물음만큼 의미를 따지는 이들이 존재했다. 아마도 세상을 좀 더 정숙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많은 철학자가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작가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폐와 의미는 얼마만큼이나 다를까. 한동안 의미는 화폐를 대적하는 것처럼 굴었다. 한사코, 그것도 자발적으로 초월적인 것과 단절한 우리 근대인이 화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세상의 효용으로는 따질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다시 너절한 초월적인 것들을 애끓듯 뒤적였다. 그래서 세상의 작은 여럿은 적은 화폐나 드물은 효용에도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했다. 의미는 화폐를 대적했던 것이 아니라 적은 화폐를 쥐여주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화폐가 좀처럼 부재하는 자리에 대한 알리바이를 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요한 것이지만 감히 화폐를 쥐여주기는 싫었던 세상이 알리바이처럼 건네던 것이 사실 의미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