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 이것은 당신을 위한 종말_이윤희, 손배영, 최은: 골목유랑기

이윤희, 손배영, 최은, ⟨사소한 완강함을 위한 쇼룸⟩, 2018

“모든 이들이 깊은 마음 속에선 세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1Q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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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을 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리고 과거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결점들 그리고 오점들을, 인정하고 삼킬 것을 각오하고 선언했다. “내가 잘할게.” 당신의 오래고 먼 연락을 기다릴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변덕에 호응하고 독과 같은 말을 참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초과할 아직은 빈칸의 어떤 것. 그것을 담보로 비었던 사랑을 잠시간 빚져 온대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게 될 것이다. 그때의 우리는 사랑에 부족한 것이 있어 그것을 채움으로 존속되거나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 자체가 없었음을. 사랑의 양태, 형상, 질료와 같은 것들이 변질된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이별을 짓는 것은 ‘사랑 아님’의 어떤 것임을. 

아도르노가 2차 세계대전 속에서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계몽의 변증법」, 1944, 서문)라고 물을 때 그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우리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사이를 이간질 시킨 것을 이성과 그것의 여정이었던 계몽으로 지목하고 철학이 조금 더 해석에 나서야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내가 잘할게”로 들린다. 그러나 그의 비관적인 이 근심은 어쩌면 끝끝내 낙관적이었다.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해왔던 성찰들과 더 나은 세계를 창립하고자 했던 실천들은 사실 전체와 동일성 아래 개별적인 것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폭력이었다는 것. 그렇게 모든 혁명은 전체주의로 끝났음을 마주하고도 그는 끝내 이별을 짓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아냈다. 이별을 짓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벤야민도, 사르트르도 그리고 아렌트조차도. 아마도 철학은 거기에 힘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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