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열사흘 뒤, 단원고등학교를 마주한 경기도미술관에는 합동 분향소가 설치됐다. 이후 4년 동안 91만 명이 넘는 시민이 이곳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과 아픔을 나눴다. 경기도미술관에선 2주기와 3주기, 7주기에 맞춰 추념전이 열렸고, 미술관은 애도의 공간을 넘어 예술과 사회의 연대 장으로서 공동체의 의미를 질문했다. 그리고 지난달 10주기를 맞아 네 번째 추념전 <우리가, 바다>(4. 12~7. 14)가 열렸다.
예술이 곧 정치는 아닐 것이다. 붓이나 펜을 잡는 것으로 혹은 미술관의 문턱을 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이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한에서 예술이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벗어나야 하는 것은 정확히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논리다. 예술은 그 현실을 보는 다른 논리, 다른 시선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삶과 연결됨으로써 정치적이게 된다. 정치가 다른 삶을 발명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리는 미술이 어떻게 정치의 개념을 건네는지, 어떤 식으로 정치를 미술에서 읽어낼 수 있는지를 볼 것이다. / 조재연
7/6 「행복은 절규」_이승주, ⟨이상한 나라⟩
7/7 「속세는 숭고」_이우성, ⟨당신은 왜 산에 오르십니까?⟩
7/8 「권능은 역량」_우정수, ⟨캄 더 스톰⟩
7/9 「중심은 주변」_최요한, ⟨Q_Fungi⟩
7/10 「블루는 화이트」_방성욱, ⟨Green Collar Wor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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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윤리는 현자의 돌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윤리는 이제 어느 사태에서든 어떤 대상에서든 또 어떤 시간에서건 폭력을 증류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을 ‘악’이라 부를 수 있다고 자신 있고 대담하게 소리친다. 범죄, 테러 행위, 사회 폭동, 전쟁 그리고 그로부터 비명을 지르고 눈물짓고, 피를 흘리는 인간의 군상들…을 두고 어떻게 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냐고 그는 윽박지른다. 그러니 우리는 윤리를 논할 때 단 한 마디를 준비하면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그럼 상대도, 우리도 입을 앙다물 준비를 할 것이다. 이로써 폭력이 윤리 전반에 연역되는 것은 쉽고 진부한 일이 되었다.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것, 대화와 토론을 거치지 않는 것, 강제로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는 것, 위력으로서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혼란 속에서 종용하는 것까지. 우리는 모조리 폭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윤리가 현자의 돌을 발견했을 때, 동시에 세계에서 소실된 것은 대문자로 쓴 ‘정치’의 근원적인 원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토요일(19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 퀴어들을 비롯한 이들이 행진을, 여전히 행진을 하는 상황에서도 ‘폭력’은 너무도 쉽게 낯빛을 내밀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대가 있다면 마땅히 토론을 거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퀴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회에서 합의 없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기습적으로 연단을 향한 이에게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와 “나중에”라는 연호가 응답되었고, 육식은 폭력이라는 구호는 오히려 채식이 폭력이라고 응답된다. 대관절 윤리는 그 낯빛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차별금지와 페미니즘을 그리고 채식까지도 폭력으로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이러한 운동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소명하고, 그들이야말로 폭력이라는 것을 규명하고 지탄하는 데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운동들을 저지하는 그들의 말짓과 몸짓들은 폭력이 맞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들도 역시 폭력이다. 그런데, 폭력이 어쨌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