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득 자수를 하고 싶어진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장마철마다 대야와 바가지로 물을 푸던 양친을 잊고 지냄에 대하여, 익지도 않은 낯선 짐승을 뼈째로 허겁지겁 삼키고는 그 비가 타고 내려오던 깊은 계단에 게워냈던 기억의 부재에 대하여, 새벽 내 심장 타는 냄새를 맡던 가족의 얼굴을 모름에 대하여, 그러니까 그 어느 것도 내가 머물고 있지 않음에 대하여.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집에만 가져오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지. 쥐기 위해서 꺾어야 한다는 것과, 언덕을 넘어오는 바람만은 가구로 재현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누구를 사랑하는 태도가 사실 끔찍하게 다르다 것이 내가 그곳을 기억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 누군가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갈 스스로 생성해내는 생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가 밤이나 폐허 같은 것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오일 대신 유채라 발음하고, 시침은 물론 형광등이 씨끄럽다는 것을 앎은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이 사소한 소리들을 말미암아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집으로 가는 길마저 망각할 수밖에. 흐린 날, 미사일_차지량: New Home – Stay 더보기
[태그:] 예술
그다음 누구도 비웃지 않게 된다_정희영: 짐승에 이르기를
경고문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당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당할 것이다.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군사령관 G. G.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핀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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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약하다고 외칠 수는 없을까, 각자의 강함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투사처럼 굽히지 않는 의지로 세상을 변혁하는 이야기를 나는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세계를 몇 개의 명제로 단호하게 진단하고, 적을 규탄하는 위대한 일은 내게 할당되지 못한다. 내 생김새는 오랫동안 비겁하고 비천하다. 광장의 절정 위에서 나는 늘 비켜서 있었다. 누군가 밀치기도 전에 인도에 먼저 올랐던 그리고 매쓰거운 분무를 몇 분 버티지도 않던 나는 궐련 어느 쪽에 입을 맞추어야 할지 몰랐을 때부터 내 자격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내 몸도 타인의 물건도 숨기는 데 익숙한 내 앞은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그래서 무언가 쓸 때마다 나는 늘 에둘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우회에도 애써 걷는 까닭은 비겁은 차치하더라도 비천으로 구할 수 있는 의미가 있단 절박함에서였다. 고귀하고 완고함이란 조금도 없는 천함과 미약에서 길어낼 답이 어딘가엔 존재한다는 것. 외려 강함을 서로 앞다투어 외치는 이들이 초래한 세상에서 오직 미력으로써 발견할 가치가 있다는 것. 이 멍에 같은 희망을 뿌리칠 길은 없었다. 그러니 비겁함 때문에 내가 아니어도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_뀨르와 타르_RRRRRRRRRRR..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슬라보예 지젝 (11.10.08. 월가점령시위에서)
11이 글의 제목은 뜨거운 감자의 <좌절 금지>의 가사 “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에서 인용했다.
우리에게는 해안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바다는 강으로 흐르지 않기에, 그것이 영영 삶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한다—못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코르크 마개로 닫힌 구원의 글귀나 형상이 있을 것인 한, 의무는 도무지 저버리지 못한다. 마지못해 해안선에 도착하는 비지 않은 병들. 비로소 그 병들을 기다린다. 그들은 각자의 무인도에 제 발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짓고 지은 것을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었냐고는 물을 수 없다. 구원은 절망의 무릎에서 올 리가 없는 까닭이다. 병 안에는, 오직 흘겨 볼 시야와 성토할 입조차 잃은 절망의 나락에서 찾은 것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는 부재하는 목격과 증언을 갈음할 유일한 증거가 담겨있다. 그렇게 그들은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서 선택할 수 없었지만, 단지 어떻게 끝날지는 선택할 수가 있었을 뿐이다. 해안선에 도달하는지 혹은 더 나아가 삶의 근처까지 도착하는지는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도달과 도착을 가지고 실패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멈추는 순간은 실패가 된다.
몇 시인가요_BGA Compliation 41.
미술은 모든 요소들이 동시에 보이도록 그려진다. 그림을 보는 이가 각 부분을 살피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림 전체의 동시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술은 보통, 시간예술이라는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 중에선 평면에 시간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존재한다. 이번 컴필레이션은 그러한 시도를 담는다. 그림의 개체를 다르게 정의하는 것, 개체 윤곽이 불투명해지거나, 왜곡되는 것은 모두 존재가 생성이 되는 것으로써 시간을 갖는다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째서 문제일까. 고정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은 그것이 어디서부터(과거) 지금에 도착해있고 또 어디론가(미래)로 흘러갈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앞당기는 것을 통해서 현재를 다시 극복하려는 힘을 지닌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현재는 과거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자, 다시 미래를 위해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된다. / 조재연
9/14 「원은 회전하는 점」_박영준, ⟨곰곰⟩
9/15 「모든 것은 흘러내린다 1」_이해민선, ⟨봉우리⟩
9/16 「모든 것은 흘러내린다 2」_정희승, ⟨큰 폭포⟩
9/17 「반복이 아니라 번복」_박영준, ⟨패턴 16⟩
9/18 「하지만 몇 시인가요」_고현정, ⟨얼굴⟩
기억을 딛고 얻은 망각_남지연: Story(story)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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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내내 났지만, 아침 안개가 그것을 머금곤 해가 뜨자마자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괜히 타고난 자리, 지글지글 끓던 곳을 정말 다 타버렸을까 보았을 때 그 자리엔 그을음조차 없었지만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통해서야 기억할 수 있던 것이었고, 기어코 사진조차 없이도 선연히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가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날 밤, 나는 어렴풋한 것들을 내어준 대신에 지울 수 없는 것들을 새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게 망각만이 내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파열의 발견만이 내가 어디서 온 이가 아니라,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이임을 알려주었다.
얼음은 숯_BGA Compliation 31.
예술이 곧 정치는 아닐 것이다. 붓이나 펜을 잡는 것으로 혹은 미술관의 문턱을 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이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한에서 예술이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벗어나야 하는 것은 정확히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논리다. 예술은 그 현실을 보는 다른 논리, 다른 시선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삶과 연결됨으로써 정치적이게 된다. 정치가 다른 삶을 발명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리는 미술이 어떻게 정치의 개념을 건네는지, 어떤 식으로 정치를 미술에서 읽어낼 수 있는지를 볼 것이다. / 조재연
7/6 「행복은 절규」_이승주, ⟨이상한 나라⟩
7/7 「속세는 숭고」_이우성, ⟨당신은 왜 산에 오르십니까?⟩
7/8 「권능은 역량」_우정수, ⟨캄 더 스톰⟩
7/9 「중심은 주변」_최요한, ⟨Q_Fungi⟩
7/10 「블루는 화이트」_방성욱, ⟨Green Collar Workers⟩
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_김학량: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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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자- 변신이다_임동승: TRANS
비록 얼어붙고 고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간에 존재를 흘려보내려는 것이 또 공간으로 발하려 하는 것이 있다. 동그라미가 ‘평면 위의 한 점에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점들의 집합’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시간도 공간도 갖지 않은 셈이지만, ‘일정점을 원점으로 하여 평면상을 회전하는 폐곡선’을 뜻한다면 그것은 어느새 시공간 안을 흐르고 차지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머리가 꼬리를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식별이 불가능하도록 빠르게 회전하는 까닭이다. 비명도 발작도 없이 정지된 평면만이 강조된 것이 그림의 본질이나 운명이라고 전하는 것은, 임동승이 말한 “영화적인 면모, 강점이 회화의 영역에서 비본질적이고 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기”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운명을 거스르는 것과 따르는 것이란 양자의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은 과녁을 빗나간다. “무엇을 그려야 하고 무엇을 그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누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할 수가 없어졌다. 정지의 결정이 발생을 가능하게 만들고, 발생을 결정한 곳에서 정지가 증식된다. 그러니 그리는 자가 이제 해야 할 것은 그것에 “항상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 이후에 나서는 것이다. 임동승의 《TRANS》는 어느 입장을 선택하든지, 결국 반대의 선택의 책무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 조재연
0章_샌정: VERY ART
부분과 차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어버린 셈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고, ‘차이’를 가진 것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여서는 안 된다. 애틋한 우리는 존중과 인정 말고는 할 것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때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부분은 부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닿는 운명을 지닌 것이고, 가치와 의미는 한시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지역 그리고 시간의 차이마저 따돌리는 보편적인 필연을 지닌 것이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오랫동안 서성이는 인간처럼 예술도 그렇게 잦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역시 이제는 ‘세상은 이렇다’고 자신 있게 얼버무리는 대신에 ‘내가 보는 세상의 부분은 이렇다’고 또박였고, 누구나 함께 앓고 있는 히스테리 대신에 스스로의 신경증을 진술하는 데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예술은 ‘어떤 것에 대한’ 예술, ‘어떤 것을 표현하는’ 예술 혹은 ‘나의・내게 예술’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부분으로 한정 짓는 선에서 정확하다고 믿는 시간을 인간과 함께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그저 ‘예술’이라고 이름 짓는 예술이 나섰을 때, 그리고 한 도시의 짧은 시간을 겨우 머물다 떠날 유한한 존재가 이 모든 부분과 유한함을 부정하고, 전 지구별에서 스스로는 어디에나 있으며 어느 때나 있다면서 어떤 수식어구와 한정어구도 소거하고 그저 ‘예술’로 나설 때, 나는 휘청했다. 샌정의 ⟪VERY ART⟫는 ‘어떤’ 예술만이 존재하려는 세상에서, 예술’만(very)’이려 한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_정원석: 할아버지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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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하게와 물끄러미가 어긋나고서야 비로소,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었다. 열지 않는 서랍 속의 드물게 남는 사진처럼 사랑도 무수히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한심한 반복들을 고작 잊고선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을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영원을 부정할 그 말이 준비된 것이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는 비로소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이제까지 ‘영원’이란 낱말이 고비를 맞았던 것은 ‘영원’을 영원으로 맞이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영원은 영원을 지지하고 믿음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부정하고 의심할 때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상징을 다이아몬드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손쉽게 모든 사물에 함부로 부딪쳐 보고 떨어진 파편에 당혹감을 느끼지마는, 사랑을 대추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좀처럼 부서질 것을 알기에 감사하고 조심히 안는다. 현명한 자들과 믿음 있는 자들이 모두 틀려 사랑이 종말의 위기를 맞는다해도, 여전함으로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믿지 못해 떨고 있던 자들의 몫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