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 자동응답_박혜수, 안부: 굿바이 투 러브

안부 ⟨Excusez-moi⟩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52×4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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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헤어질 때만 사랑을 하였다. 없다, 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뿐일 때. 나는 사라진 연인에게 가장 성실하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고 속삭이지 않자 아침을 잃게 되었고, 오늘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아 다섯 평 방안에만 머물게 된 나는 비로소 네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내가 너를 가졌던 사이 너는 생활의 도구였다. 옷을 골라주고 저녁을 챙기고 야음을 데우는 기계였던 너는, 부재와 동시에 충실한 연인이라는 도구적 현전의 방식에서 사라지기로 결정한다. 그 순간 경첩이 빠진 하루는 종일을 삐걱거리고, 용도 속으로 융해되었던 어떤 그는 첫날처럼 삼킬 수 없는 고체로 나타난다. 사랑의 이름으로 연인을 녹이었듯, 사랑의 이름으로 너를 응고시키어 나의 이마를 건드린다. 사랑이 만남 아래 멀어졌다가 이별 위에 다시 내린다. 사랑이 조건 없는 상태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다행히 이제 네가 없어 나는 사랑으로 나아간다. 손안에 없는 연인. 나, 질투 없이도 너를 그릴 줄 알고, 구속 없이도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부재하는 연인에 대한 예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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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Ground

<디딜 곳 없는 사다리>(4. 6~5. 1 드로잉룸)를 보며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2009)을 떠올렸다. 여기에는 기둥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수많은 애벌레가 등장한다.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이하 줄무늬)가 여정의 이유를 묻자 누군가 답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틀림없이 굉장히 기막힌 것이 있을 거야.” 이에 수긍한 줄무늬는 다른 애벌레처럼 남을 짓밟고 밀치면서 기둥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만을 깨닫는다. 줄무늬는 기둥을 내려오며 이 사실을 전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다수에게 진실은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쁨보다 자신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이었다.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닌 날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줄무늬는 비로소 나비가 된다. 여기서 ‘꼭대기’는 더 이상 기둥의 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먹고 자라는 것보다 더 나은 생활이 분명 있을 거라던 줄무늬의 꿈에 가깝다. 삶에는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남을 짓밟고 밀치며 오르는 경쟁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그런 한에서 ‘디딜 곳 없는 사다리’는 상승을 소망하는 이에게는 서글픈 낱말일지 모르나, 삶을 달리 보는 이에게는 어떤 비관도 개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려 희망에 어울린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이자 사진작가 안부의 출품작 <겹>(2020)은 ‘오르기’보다 ‘밀기’에 적합해 보였다. 작업은 위계를 갈망하며 세계의 높이에 다가가기보다는 삶의 너비를 재기 위한 바퀴를 지닌다. 줄무늬는 정상에서 추락한 애벌레의 주검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오르기를 포기하고 쌓인 의자를 내려놓으면, 우린 눈을 맞추며 함께 앉아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동화의 말미에서 다른 애벌레 역시 지상으로 내려와 나비가 된다. 두려움을 확신으로 바꾼 건 이런 문장이었다.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는 여기 함께 앉을 테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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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유기체로 아버지_안부: 잘-못-하다

안부, ⟪잘-못-하다⟫, 킵인터치서울,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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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수 있게 된 이는 영토 밖의 너비와 시간만큼 사투리를 배웠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는 영토를 만든 그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를 아비라고 여길 수 없었다. 이방인은 가정에서 색료 냄새 거두지 않는 곳으로 또 저울 없는 도수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생물적 아비를 부정하고 이념이라는 의붓아비를 섬기게 된 까닭이다. 이 불화로부터 구호 받기 위해서 번역자에게 사정을 해볼 수도 있고, 옛 언어를 더듬으며 교류에 나설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영토 안의 안온을 위한 것이지 사랑하던 그러나 녹아내린 것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은 그에게 건넨 녹아내린 것들을 위하여, 건너에 있는 그가 외려 ‘이방인’이 되도록 영토 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 녹은 것들은 응고될 것이고, 아비 역시 응고된 것이라면 녹아내릴 것이다. 당신은 거기 말고 여기서 아름다워라. 그렇다면 변천을 벗어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빙되는 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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