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믿게 하는 예술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조심스럽다. 그것이 터무니없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가 조급하게 예술을 원망하게 될까 봐 그렇다. 그러나 예술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바꾼다는 이야기라면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 전력으로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의 자취가 그 말을 증명한다. 도미야마는 분명 수많은 삶을 바꿔냈다. 그는 전환 시대의 투사였다. 1921년 일본 고베에서 출생한 도미야마는 세계의 폭력과 불의에 맞서며 격동의 역사를 화폭에 증언했다. 일제 강제 노역과 위안부, 탄광 노동자의 비극,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 독재, 5·18을 포함한 한국의 70, 80년대 민주화운동, 후쿠시마원전사고 등이 작가가 온몸, 온 생을 거쳐 부딪쳤던 문제였다. 그림을 보고 그림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그림이 우리를 봐주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느낌. 사람들은 도미야마를 “어디를 보아도 우리 편 하나 보이지 않는 먹먹함 속에서 우리 모습을 봐주고, 우리 이야기를 해주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기억했다. 비극이 삶을 휘저어 지나간 후에도 살아갈 힘은 남아있다는 것. 도미야마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역시 이 소회와 같지 않을까. 슬픈 장면을 그릴 때면 작가는 종종 나비를 그려넣었다. 스산한 후쿠오카형무소, 강제동원 희생자의 주검, 피가 엉긴 철조망 위로도 나비는 팔랑거렸다. 비극은 결국 우리 생에서 나비 하나, 나비가 올 봄 하나 쫓아내지 못한다. 작가의 그림은 폐허 어딘가에도 꽃향기를 맡도록 만든다. 그런 도미야마가 8월 18일 별세했다.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우리라면 조금 더 오래 예술을 믿어볼 수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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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의 끝에서

내 비겁과 작음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 나는 자격 미달의 운동권이었다. 비극이 아닌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 나는 늘 비켜서 있었다. 광장을 향하기로 마음을 먹는 일은 더뎠고 현장에서는 충돌이 두려워 앞장서지 못했다. 정당에 적을 둔지 오래였지만 누군가 나의 허물을 모르고 덜컥 동지라 부르게 될까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투사처럼 나서는 이를 볼 때면 열등감에 괴로웠다. 나는 무얼 바라 비겁을 삼키며, 이다지도 작은 것일까. 자멸감이 무릎에 닿았을 때 즘 서동진의 글을 읽었다. “자본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식이 노동 운동은 아니다. 유령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와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이는, 환상을 만드는 힘에 저항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이 말에 목이 메였다. 나의 처신을 변명할 수 있는 문장을 찾아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제가 해결을 바라며 잊지 않기 위한 기록으로서 비망록을 남길 수 있다는 기쁨이었다. 나약한 지금의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가담할 실천이 존재한다는 기쁨을, 그의 글로부터 발견했다. 그렇게 그의 글을 베끼고, 발제문을 쓰듯 연습하고, 각주에 그의 이름을 올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지껏 남루를 벗어나지 못한 오늘, 서동진의 첫 기획전 <안전가옥에서의 밤>(7. 16~28 빌라해밀톤) 소식을 듣고 나의 처음이 떠올랐다. 또다시 내 비겁과 작음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 나는 내가 변혁의 자리에서 가장 앞서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이 있어, 선두가 아니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남겠다는 결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가 말했듯 행복을 추종하지 않는 삶, 그 생을 찌꺼기까지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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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없는 마음

인간의 감정이 결국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서글프다. 시곗바늘 대신 심장 소리가 좁은 방을 채웠던 숱한 새벽이 고작 물질 기관의 일이라면, 우리에겐 예술보다 신경 전달 물질을 조절할 향정신성 의약품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김학량의 개인전 <짱돌, 살구 씨, 호미>(5. 5~6. 5 전주 서학동사진관)를 나오며 서두에 했던 말을 취소하기로 했다. 전시는 제목처럼 소담치 못한 사물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겼다. 서사도 색면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도 부러 지어냄 없이 오직 사물의 실체로만 구성되는 그림. 그러나 그 실체 때문에 사물은 추상의 낱말보다 마음을 더 정확하게 발음한다. 감정은 개체 내부의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자주 그리운 누군가에게 물들어갈 때, 함께 있는 동안 그 애틋함에 타일의 먼지처럼 흔들릴 때, 불안이 혓바늘처럼 움틀 때면, 물듦, 먼지, 흔들림, 바늘, 움틂이라는 외부에 놓인 물질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선 마음은 도무지 스스로를 고백할 수 없다. 김학량의 그림은, 말재간 없는 감정이 빌릴 사물을 인간의 사전에 추가한다. 나는 마음 어딘가 이름을 지니지 못한 감정에 짱돌, 살구 씨, 호미를 빌려와 발음해본다. “발견한 사물을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반대로 사물에게 나를 들켰다.” 작가가 들킨 것은 사물을 닮은 마음이었을 테다. 감정이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보다, 누군가의 감정에 정확히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이 나를 더 서글프게 만든다. 이해받지 못한 이가 있을 때면 예술은 늘 사물의 처소를 찾았다. 그러니 오해를 면치 못할 일이라 해도 헌신을 그칠 리 없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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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었네

화가 정지현, 그는 개인전 <ONE WAY>(4. 14~5. 16 상업화랑)에 깊은 밤 풍경을 목탄으로 담았다. 사람보다 사물이 재잘거리는 시간. 인간 형상(人形)이 제 머물 곳으로 귀향한 자리에 빈 처소만이 남았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한 걸음을 더 옮기는 순간 불행히도 어느 노인과 마주치고 만다. <두 개의 빛>(2021). 밤을 모르는 듯 그는 수레에 폐품을 싣고 귀향과는 먼 곳으로 나선다. 세상 누구도 수레를 끄는 노인의 안부를 물은 적 없었다. 하루를 들여 수거한 사물보다 많은 사람과 마주쳤지만, 누구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안부도 인사도 접근하지 않는 존재는 사물과 구분되지 않기에, 전시장을 나가 사람의 세계로 향하는 일이란 노인은 도무지 할 수 없다. 그를 담은 작업조차 사물의 이름을 하고 있어 인형을 빗겨 지나간다. 정지현은 우리보다 먼저 그와 마주쳤던 모양이다. 어떤 일도 기록에 남고, 무엇도 검색만 한다면 찾을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를 유일하게 기억한다. 국가 통계 속에서 이제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력한 물증 앞에서 작품은 더 처연해진다. 절대적인 빈곤이 사라졌다고 믿는 곳에서 가난은 멀고, 드물고, 예외적인 개인의 처지로 남았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클레의 말을 달리 읽어본다. 예술의 책무는 행복만 존재하는 곳일지라도 그곳에 마지막까지 슬픔을 남겨 놓는 일이다. 불행을 기꺼이 껴안기 위해서, 슬픔에 지겹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 예술은 여전히 세상에 머문다. 전시장을 나오며 한숨을 쉬려다 참았다. 나는 무슨 권리로 한숨을 쉬는가.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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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Ground

<디딜 곳 없는 사다리>(4. 6~5. 1 드로잉룸)를 보며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2009)을 떠올렸다. 여기에는 기둥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수많은 애벌레가 등장한다.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이하 줄무늬)가 여정의 이유를 묻자 누군가 답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틀림없이 굉장히 기막힌 것이 있을 거야.” 이에 수긍한 줄무늬는 다른 애벌레처럼 남을 짓밟고 밀치면서 기둥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만을 깨닫는다. 줄무늬는 기둥을 내려오며 이 사실을 전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다수에게 진실은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쁨보다 자신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이었다.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닌 날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줄무늬는 비로소 나비가 된다. 여기서 ‘꼭대기’는 더 이상 기둥의 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먹고 자라는 것보다 더 나은 생활이 분명 있을 거라던 줄무늬의 꿈에 가깝다. 삶에는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남을 짓밟고 밀치며 오르는 경쟁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그런 한에서 ‘디딜 곳 없는 사다리’는 상승을 소망하는 이에게는 서글픈 낱말일지 모르나, 삶을 달리 보는 이에게는 어떤 비관도 개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려 희망에 어울린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이자 사진작가 안부의 출품작 <겹>(2020)은 ‘오르기’보다 ‘밀기’에 적합해 보였다. 작업은 위계를 갈망하며 세계의 높이에 다가가기보다는 삶의 너비를 재기 위한 바퀴를 지닌다. 줄무늬는 정상에서 추락한 애벌레의 주검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오르기를 포기하고 쌓인 의자를 내려놓으면, 우린 눈을 맞추며 함께 앉아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동화의 말미에서 다른 애벌레 역시 지상으로 내려와 나비가 된다. 두려움을 확신으로 바꾼 건 이런 문장이었다.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는 여기 함께 앉을 테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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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hwp

“유년 시절, 어머니께서는 청력이 좋지 못하셨습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여기서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듣는 많은 소리를 듣지 못했고, 내가 건네는 말들은 늘 희미해진 후에야 가닿았다. 같은 것을 듣지 못할 때면 나는 내가 듣는 것을 스스로 의심해야 했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면 반드시 전해진다는 말은 믿음 잃은 동화처럼 들렸다. 학년이 바뀌면 나는 친하게 지내던 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나의 느낌과 기억이 그와 같을 것이란 생각은 도무지 책임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해의 층위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그렇게 나는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롭다는 말은 아끼기로 했다. 결국 서로에게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결론 앞에서도, 이해를 그치지 않는 일들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또 일상적 언어가 이해에 부침에 겪을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일들이 남아있는 때까지는. 쉽게 외로워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론보다 결심에 더 가까운. 예술은 그런 한에서 내 이야기 같았다. 나희덕이 마크 로스코의 <No.16>(1958)을 보고 쓴 시 「마크 로스코」(『파일명 서정시』, 2018)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마음을 소등한 자에게만 보이는/희미한 빛은/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비극을 두제곱한다. 그는 자신의 등불로는 타인의 느낌과 의미를 비출 수 없다는 결론을 알기에 이내 등을 끄고 말았다. 첫 번째 비극이다. 그러나 등이 꺼져 주위가 어두워지자, 마침내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예술의 빛이다. 그러나 결국에 그 역시 “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제곱 된 비극. 하지만 그에게 이제 그러한 결론은 중요치 않다. “벽이 못을 간신히 삼키듯” 이미 그는 결심했으므로. “누군가에겐 순진해 보이더라도 이해에 가닿을 것이라는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이 제 삶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예술과 가까운 삶만이 저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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