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미술제, 아트부산, 아트오앤오: ‘차별화’를 새 돌파구로

4월 화랑미술제, 부산국제화랑미술제, 아트오앤오 개막 프리뷰

화랑미술제(2023) 전경

오는 4월, 2024년 국내 미술시장의 향방을 판가름할 세 아트페어가 열린다. 화랑미술제(4. 3~7 코엑스),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4. 11~14 벡스코, 이하 BAMA), 아트오앤오(4. 19~21 세택)가 그 주인공이다. 올해 역시 불황이 이어지리라는 전망 아래 각 아트페어는 아이덴티티 강화로 돌파구를 찾는다. 도약의 계절. 화랑미술제, BAMA, 아트오앤오는 과연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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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근: 베를린 표류기

오에이오에이갤러리, 호상근 5년 만의 개인전

호상근 〈길 위에 누워있는 카트〉 종이에 연필, 색연필 59.4×42cm 2023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채집하는 화가 호상근.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호상근재현소’를 통해 모집한 타인의 이야기 등 보통의 삶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순간을 생생하게 재현해 왔다. 그가 개인전 《호상근 표류기 2023: 새, 카트, 기후》(11. 10~12. 23 오에이오에이갤러리)를 열고 회화 29점을 공개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작가가 이방인의 눈으로 거리에 숨은 이질적 존재를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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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환: 야생의 ‘낭만주의’

갤러리바톤, 배윤환 개인전

배윤환 〈건드릴 수 없는 토끼〉 캔버스에 아크릴릭 53×46cm 2022

배윤환은 사회 부조리를 우화 기법으로 화폭에 펼친다. 자본주의, 환경 파괴, 지역 이기주의 등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작가의 직간접적 경험과 결합해 스토리텔링으로 풀어왔다. 자칫 무거워 보이는 주제지만 그의 그림은 진지함과는 거리를 둔다. 캔버스에는 금방이라도 동화책에서 튀어나올 듯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동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토끼와 코알라, 북극곰, 늑대 등 의인화된 캐릭터는 주제를 유쾌하고 쉽게 전달하는 매개체다. 그리고 이러한 화법 저변에는 배윤환만의 풍자와 해학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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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배영: 사물, 현전, 투쟁

하이데거는 ‘눈앞에 있음(Zuhandensein)’으로써 현전하는 존재와, ‘손안에 있음(Vorhandensein)’으로써 도구화된 존재를 구별했다. 사물이 도구적 용도로 파악되는 한 존재는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대리석을 재료 삼은 조각은 대리석 계단이 감춰놓은 것을 드러낸다. 일상에서 대리석 계단은 통속적인 부유함의 이미지로 보인다. 그러나 대리석 조각은 작품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던 물질의 현전을 보여준다.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하이데거는 그렇게 고흐의 구두가 신체의 보호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제 입으로 대지를 발음한다고 적었다. 이 순간 사물은 더 이상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한 출발점으로 남지 않는다. 외려 작품이 사물을 이해하는 장소가 된다. 이 전환은 단순히 예술적 사건을 넘어 우리를 일상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러나 작품이 된다고 해서 언제나 사물이 자유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서술에서 생략된 점이 있다면, 사물이 용도라는 ‘식민’ 상태에서 벗어날 때 동반된 지난한 투쟁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영배의 작품은 그 투쟁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사진은 작가의 개인전 <프로-포즈>(11. 6~27 사가)에 출품된 <하나의 의자 두 개의 다리 세 개의 동그라미>다. 낡은 표면엔 스스로의 용도를 폐기하기 위해서 분주했던 학대에 가까운 투쟁이 포괄돼 있다. 그가 이제껏 편의를 순순히 제공한 것은, 그로써 자신을 가학해 창조자가 부여한 소명(기능)과 갈라서기 위해서다. 그리고 작가는 이 역모에 권위를 잃는 첫 번째 인간이다. 단 한 번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피사체를 놓치는 사진사는, 자신의 무능으로 사물의 독립에 기여한다. 쓸모의 박해를 피해 구르고 질주하며 의자는 비로소 용도로 가득 차 눈먼 세계에 혀를 굴려 침을 뱉는다. 영배가 카메라를 들고 장소를 찾는 동안 의자엔 누구도 앉지 않았고, 치워지지도 않았다. 저 현전하는 존재를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그는 이제 세계를 발음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말을 잃었다.

참조
진은영, 「선행 없는 문학」,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pp.5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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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수: 기하적 추상의 ‘온기’

이유진갤러리, 경현수 신작 개인전 《매직 램프》

경현수 ⟨Magic Lamp⟩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130.3cm 2022

화가 경현수의 개인전 <매직 램프(Magic Lamp)>(9. 16~10. 8)가 이유진갤러리에서 열렸다. 점, 선, 면 등 도형 이미지로 구성한 회화 19점과 조각 6점, 총 25점의 신작을 공개했다. 작가는 정동과 깊이, 마티에르, 운동 등 추상의 난제를 실험하는 화법으로 새로운 기하학적 추상에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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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실루엣의 정치학

학고재갤러리, 사진가 노순택 개인전 《검은 깃털》

노순택 ⟨검은 깃털 #CHL0701⟩ 아카이벌 잉크젯 피그먼트 프린트 108×162cm 2017

노순택은 분단 체제가 야기하는 ‘파열음’을 사진으로 포착한다. 그가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 《검은 깃털》(6. 22~7. 17)을 개최했다. 역광을 이용한 사진 19점을 선보였다. 5년 만에 신작 발표지만, 작가는 그동안 사회, 정치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뜨거운 현장에서 어김없이 자리를 지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규탄 텐트 농성,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 복직 투쟁,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 건립 운동 등 연대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 작업 역시 이러한 현장에서 느낀 문제의식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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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없는 사람

이별에 성실한 이가 마지막으로 내리는 결단은 사진을 지우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약속했던 망각을 부여받지만 동시에 어떤 저주도 함께 앓게 된다. 그는 이제 빈 사진첩으로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 사진에 기대지 않고도 영원히 동반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일상의 암기가 간수할 만한 것을 선택해 만드는 기억의 연금술에서 비롯된다면, 망각은 사라진 것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남아버린 야금술을 말미암는다. 노순택의 사진엔 이런 야금술이 담겨있다. 작가는 대추리사태, 용산참사, 제주해군기지 반대 투쟁, 세월호 진상 규명 집회 등 정치적 순간에 빠짐없이 섰지만 그 장면을 낱낱이 기록하려 분전하는 저널리즘의 언어에 종사하지 않는다. <얄읏한 공>의 들판엔 민간인의 시위를 진압하러 투입된 군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망루의 불길과 주검을 모두 어둠으로 감춘 <남일당 디자인 올림픽>에는 오직 실루엣으로서 하나의 조형이 자리한다. <가뭄>엔 최루액을 내뿜는 살수차도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도 생략되어 물줄기만이 남았다. 그러나 지워진 것이 있는 탓에 지워질 수 없는 운명을 부여받는 존재들이 눈을 뜬다. 나는 이제 군인 없이도 들판만으로 대추리의 비극을 떠올릴 줄 알게 되었다. 불길과 주검이 보이지 않아도 모든 조형에서 살고자 또 빼앗기지 않고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망루에 올랐던 이들을 본다. 그리고 어느 흐르는 물만으로도 4월 16일을 그리고 거리에서 떠나보낸 한 노인과 만난다. 노순택의 사진 앞에서 우린 사라져버린 것들에 가장 성실하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곳에서 모든 그들을 기억할 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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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쳉: 디지털 창세기, 게임과 AI의 만남

리움미술관, 이안쳉 개인전

〈사절, 완벽을 향해 분기하다〉 라이브 시뮬레이션, 스토리, 사운드 무한 길이 2015~16

이안쳉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가상 세계를 창조하는 미디어아티스트다. 게임 엔진과 AI 기술을 이용해 인간 의식에 접근하고, 주체와 환경 간의 상호 작용을 탐구해 왔다. 작가의 손을 떠난 후에도 프로그램은 스스로 서사와 사물을 발생시키면서 그야말로 디지털 ‘창세기’를 써내려 간다. 그의 개인전 〈세계건설〉(3. 2~7. 3 리움미술관)이 열리고 있다. 쳉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사절〉 삼부작과 애플리케이션 연동 작업 〈BOB(Bag of Beliefs)〉, 리움미술관과 함께 제작한 애니메이션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 등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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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시간도 공간도 남김없이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있는 것이다.” 수전 손택이 소설을 두고 한 이 말은 미술 앞에서 모두 미끄러진다. 텍스트는 늘 왼쪽 상단에서 시작하지만, 그림은 언제나 모든 면이 동시에 발생해 한꺼번에 밀려온다. 지명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장소를 이동할 재주 역시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림이 머물도록 허락한 곳은 영영 이 프레임이 전부다. 그래서 회화가 때때로 비극을 내보일 때마다 나는 더욱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의 절망은 기승전결도 인과 관계도 없이 왈칵 함께 쏟아지며, 도망갈 처소도 마련해 주지 않고 화면 전부가 그저 불행이라고 말하는 연유에서였다. 최진욱은 개인전 <학교를 떠나며>(3. 25~4. 23 아트사이드갤러리)를 열면서 14년 전 그렸던 ‘KTX 여승무원 파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것이 어떤 계기가 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이 <379. 우) 피, 땀, 눈물_삼부작>으로 바뀌었고, 형상도 색채도 모두 새로운 캔버스로 옮겨졌지만, 화가가 보살펴 온 어제는 내일처럼 지치지 않고 밀려와 발아래서 밑창을 적신다. 젖어 무거운 발로는 어디도 갈 수가 없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도무지 낯설어질 때까지 다시 응시해야만 한다. 갈피라도 댈 수 있다면 한 장 넘겨 도망치겠다만 한꺼번에 전부를 건네는 그림 앞에서, 존재는 똑같이 온몸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푸른색이 몇 개인지 헤아려 보고, 약지에 낀 반지가 몇 그램일지 더듬어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겁이 진한 내가 그림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가 도망칠 길을 빼앗는 까닭. 너무 빨리 잊어버렸던 날들을 속절없이 돌이키고 있다. 최진욱의 그림이 한꺼번에 주는 것은 하나의 사건만은 아니었다. 머리를 깎으며, 정작 고와서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림 단 하나 보았을 뿐인데도 4월의 바다가, 5월의 거리가 그 많고 많았던 모든 밤이 동시에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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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아 보이는 밤

불을 끄고 눈을 감아도, 조명이 눈꺼풀을 깨문 자국 사이로 기어이 빛이 들어오고 만다. 분명 없는 것인데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때, 나는 속수무책으로 어둠을 빼앗긴다. 양평 구하우스 상설전에서 다리우시 호세이니(Dariush Hosseini)의 ⟨Wide Shut 2⟩(2018)를 지나며 눈이 묶인 밤을 떠올렸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Eye’s Wide Shut⟩(1999)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호세이니는 눈으로 관찰한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서야 보이는 대상을 그렸다. 그러니 작품을 보면서 나는 저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노려보기보다는 못내 함께 눈을 붙여야만 한다. 이제껏 시각은 작품의 입을 여는 열쇠였지만, 호세이니의 그림은 스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나의 입을 여울게 한다. 너는 단 한 번 물었지만 나는 네게 영원히 답하고 있다. 검은 화면에 하이얀 포말이 일어날 때까지 혀는 눈동자를 문지른다. 작가가 흩어놓은 것이 아니라, 내 빈 밤의 문을 두드리는 기억을, 거품을 헤치며 찾아야 한다. 많은 상처를 주고 적은 상처를 받은 어제, 빙하기와 운석을 기다리는 오늘, 비겁함을 거듭하면서도 회의적인 내일. 한편 눈을 감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처음 보는 눈동자. 길이라곤 없는 온통 검은 화면으로 들어온 어떤 존재를 생각한다.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라는 결백한 시구를 미심쩍게 ‘눈 감으니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할 수밖에’로 고쳐볼까. 그래도 노를 저어 밀어온다면 은결도 포말도 주머니에 있는 걸 다 내주어, 옥같이 뱃전에 부서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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