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으로 고요를 짓는 일_비아니, 곽철안: Black Echo

비아니, 곽철안 《Black Echo》 전경 5. 14~6. 14 아줄레주갤러리

고요는 소란을 딛고 일어선다. 소란에게는 고요를 길러낼 힘이 있고, 결국엔 기척도 없이 고요가 등 뒤에 따르리라는 믿음은 견고하다. 그러나 이 말을 비가 오고 땅이 굳는다는 흔한 교훈으로 입에 담을 생각은 없다. 여윈 바늘이 떨고 있는 한 우린 나침반 가리키는 방향을 믿을 수 있다. 모두가 잠든 밤이 지닌 적막은 사실 별과 개울, 풀벌레의 낮고 작은 웅성거림으로 빚어진다. 그렇다면 고요는 소란과 나란히 놓인다. 소란의 끝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부터 시작된다. 소란이 고요의 형식일지 모른다는 것. 나는 비아니(Viani)와 곽철안의 《Black Echo》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작가의 세계는 고요하다. 완주를 마친 원과 제 길이를 모두 펼친 선. 그러나 여전히 분출하는 빛무리와 그치지 않는 선율. 누구보다 완연한 고요가 그럴 수는 없는 것. 오히려 조형 곳곳은 소란하여 고요를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은 아닐지. 이들의 파동을 여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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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미술, 사물 스스로 그린_게리 코마린: Landscape wit a Cup

게리 코마린, 〈Cake, Stacked, Green on Blue〉 캔버스에 에나멜 패인트, 수채 129×120.5cm 2022

내 그림은 사전 구상 없이 진행된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린다. 가장 훌륭한 그림은 가장 많이 실패한 그림이다. 그림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화가인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때, 바로 좋은 상태이다. 나의 목표는 그림이 스스로 그려지는 것이다. ― 개리 코마린

개리 코마린(Gary Komarin)은 사물의 잊혀진 얼굴을 그린다. 그가 풍경에서 대상 사이의 고리를 풀어내고 느슨한 자욱만을 비출 때, 그리고 오브제의 섬세한 겹 대신 앙상한 윤곽으로서 그 낯만을 드러낼 때, 우리는 사물이 어떤 얼굴을 띄었는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대다수의 화가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또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그러나 그런 그림은 아름다움만을 간신히 거느릴 뿐 진실을 담지 못한다. 코마린 회화의 매혹은 그가 대상을 모른다고 말하는 데 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을 포착했고 느꼈으며 그렸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고백. 누군가 예술이 진실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을 때, 코마린은 예술이 진실을 표현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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