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인가요_BGA Compliation 41.

표지 작품은 이해민선 <봉우리> 종이 위에 유채, 2017

미술은 모든 요소들이 동시에 보이도록 그려진다. 그림을 보는 이가 각 부분을 살피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림 전체의 동시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술은 보통, 시간예술이라는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 중에선 평면에 시간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존재한다. 이번 컴필레이션은 그러한 시도를 담는다. 그림의 개체를 다르게 정의하는 것, 개체 윤곽이 불투명해지거나, 왜곡되는 것은 모두 존재가 생성이 되는 것으로써 시간을 갖는다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째서 문제일까. 고정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은 그것이 어디서부터(과거) 지금에 도착해있고 또 어디론가(미래)로 흘러갈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앞당기는 것을 통해서 현재를 다시 극복하려는 힘을 지닌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현재는 과거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자, 다시 미래를 위해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된다. / 조재연

9/14 「원은 회전하는 점」_박영준, ⟨곰곰⟩
9/15 「모든 것은 흘러내린다 1」_이해민선, ⟨봉우리⟩
9/16 「모든 것은 흘러내린다 2」_정희승, ⟨큰 폭포⟩
9/17 「반복이 아니라 번복」_박영준, ⟨패턴 16⟩
9/18 「하지만 몇 시인가요」_고현정, ⟨얼굴⟩

(미술 구독 서비스 “BGA 백그라운드아트웍스”에서 계속)

기억을 딛고 얻은 망각_남지연: Story(story)story))

남지연, ⟨Web_ compound of texts and images 1_1⟩, 91 x 91 cm, Acrylic on canva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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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내내 났지만, 아침 안개가 그것을 머금곤 해가 뜨자마자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괜히 타고난 자리, 지글지글 끓던 곳을 정말 다 타버렸을까 보았을 때 그 자리엔 그을음조차 없었지만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통해서야 기억할 수 있던 것이었고, 기어코 사진조차 없이도 선연히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가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날 밤, 나는 어렴풋한 것들을 내어준 대신에 지울 수 없는 것들을 새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게 망각만이 내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파열의 발견만이 내가 어디서 온 이가 아니라,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이임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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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보는 법_존버거: 몇 시인가요?

존 버거 글, 셀축 데미렐 그림, 신혜경 옮김, 『몇시인가요?』, 열화당, 2019

저마다 시계를 갖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시간을 묻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드물게만 물으면서도 지금이 몇 시인지・오늘이 며칠인지 이따금씩 자주 묻곤 했던 때와 오늘은 다르다. “몇 시인가요?”는 누구에게나 물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왔고, 그 대답은 물음하는 자라면 늘 필요한 것이면서도 정확한 답이었다. 사회라는 낱말이 함께 살아가는 여럿을 묶는 일종의 상상적 지평일 때, 시간을 묻는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동시에 있는지, 즉 함께 있는지 혹은 함께하는지를 그때그때 확인하는 징후적인 암구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는 시간을 묻지 않는 우리는 이제 함께하지 않거나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도착한 것일 테다. 반대로 스스로 “몇 시”를 도처에서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몇 시”인지 물음을 재촉하는 자는 지금 주어진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을 찾는 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그저 ‘여럿임’에 ‘함께’라는 부사를 붙이려 하거나, 그런 지평을 만드는 데 헌신하려 하는 이기도 할 것이다. / 조재연

(『월간미술』 2020년 2월 제421호에서 계속)

시계판에 총_구나: 너와나와너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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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잠언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의심쩍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전하며 늘 오늘을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자랑스럽게 논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낱말을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죄책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요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이때 ‘시간’은 적금 만기일이 도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타임라인 혹은 타임 세일이라는 행사 속에 종사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소실하는 일은 ‘지금’이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항 사이에서 도려낼 때 야기된다. 시간은 모순적인 관계항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재를 따로 도려낼 때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는 현재를 획득하긴커녕 시간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에 연루하게 된다. 과거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이후’—80년 5월 이후나 14년 4월 이후와 같은—라는 기준점을 가지고 그러한 과거에 대한 부정과 지양이라는 관계에서 위치한다. 반면 미래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현재에 존재해야 했으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을 위한 시간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지양을 수행하는 관계에 놓인다. 결국 과거와 미래라는 항을 놓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지금의 세계가 과거와는 달랐고 또 미래에 역시 달라질 것이란 세계의 변혁 가능성을 견지하는 일이며, 존재에게는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에 믿음을 보태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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