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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내내 났지만, 아침 안개가 그것을 머금곤 해가 뜨자마자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괜히 타고난 자리, 지글지글 끓던 곳을 정말 다 타버렸을까 보았을 때 그 자리엔 그을음조차 없었지만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통해서야 기억할 수 있던 것이었고, 기어코 사진조차 없이도 선연히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가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날 밤, 나는 어렴풋한 것들을 내어준 대신에 지울 수 없는 것들을 새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게 망각만이 내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파열의 발견만이 내가 어디서 온 이가 아니라,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이임을 알려주었다.
[태그:] 삶
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_김학량: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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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