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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태그:] 사회적 예술
사뭇 지속하는 다툼_송가현: 이스트빌리지 뉴욕:취약하고 극단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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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하지는 말자, 우리가 뒤샹 이후를 살아간다 하더라도. 또 모든 이들이 예술가라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때에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스펙터클뿐이다. 주방장은 쉐프로, 커피를 뽑는 자는 바리스타로, 이발사는 바버로 이윽고 시간제 노동자를 크루라고 부르게 될 때 사회는 집요하게 노동을 우아한 예술로 점철시키는 욕정을 드러낸다. 노동은 자신을 주입하면서 상품을 만들고 스스로는 가리어지게 되지만, 예술이 작품을 만들 때 그의 생산자는 존재를 유지한다. 상품은 그것을 누가 어떤 의도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는지에 대한 물음들을 드물게만 허락하지만, 예술에게 그 물음들은 우연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노동과 예술 더불어 상품과 작품의 근원적인 차이였다면 사회는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아방가르드의 오래된 소원을 부정적으로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