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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사랑이 더 아름답다 그리는 병을 앓는 우리. 그럼에도 끝까지 당신을 미워하는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 잔인한 기억 사이사이에 고운 말이 떠오르고, 용서 못 할 사건을 기어이 가볍게 만들 미련이 자라날 때면 과거는 도무지 다정을 면치 못했다. 받은 상처로 결별을 짓기보다는 다하지 못했던 미안함으로 희망을 이룩한다. 이 미력한 희망이 남아 ‘미래‘는 쉬이 연기된다. 만약에 좀 더 성숙해진 채로 우리가 다시 만나고, 만약에 과거의 잘못을 수정하며, 만약에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결론이 과연 다를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무결한 환상을 지탱하는 지지체 ‘만약에‘는, 어떤 노도怒濤도 우릴 미래로 끌고 가지 않도록 지켜준다.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가리켰던 미래라는 낱말의 신세는 희망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처량해지고 말았다.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진흙 위에서 무구한 것이 피어나거나 검은 비닐봉지조차 가끔은 주황 지느러미가 빛나는 금붕어를 쏟아내는 일이 여전히 있는 세상.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하루 또 하루 희망을 발견하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태그:] 비평
불을 꺼 잠에서 깨는 일_박지형: 멀고도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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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하는 것들과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밤, 밤으로 가야 한다. 감각할 수 없었던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둠 안에 있다. 우리는 형편에 따라 필요했던 일종의 것들을 빛을 통해 알아채 왔을 테지만, 형편에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빛은 어떤 시간이 흘러도 은닉이나 유예도 없이, 외려 은닉이나 유예를 하지 않음으로써 완벽한 무지를 유지시켰다. 바랄 수 없는 것이라면 빛은 어떤 것도 드러내 주지 않는다. 빛은 이것에 합의를 초과한 어떤 사용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고 그저 지나왔던 대로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양초란 그저 실내에 있어야 한다거나, 교통 공간은 교통 공간일 뿐이니 이곳으로 집단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고 전하는 일은 모두 빛으로부터의 식별에서 야기된다. 그러나 불을 꺼 눈을 잃자, 부딪치지 않던 것들과 부닥치게 된다. 거닐지 않을 곳에서 걷게 되고, 붙잡지 않을 것을 붙잡게 된다. 은밀해지려는 부빔은 이제 가능하다. 사랑하므로, 화면을 재우고 커튼을 친다. 그제서야 새빨간 입술. 사랑함으로 불을 끄고 있다. 불을 끄면 잠을 깨워주지 내 사람아.
해후의 질감_박현: thedesert.x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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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운명에 대답할 수 없는 까닭은, 운명이 말을 걸지 않는 탓이 아니라 운명을 들을 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하여 참견하거나 설득에 나서는 일, 그도 못한다면, 원망을 가하는 일에는 여기선 도무지 돌입할 수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벌어져 버린 사태에 스스로가 맞춰지도록 가담하거나, 휩쓸려 가도록 스스로를 표류시키는 것뿐이다. 어떤 것도 정당화를 되물음하지 않으며, 그 무엇을 이해했는지에 관한 검토는 함구된다. 삶의 실패는 그 어떤 주장으로도 반박할 수 없다. 이 모두는 시장과 경제가 말이 아니라 단지 숫자만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벙어리는 그 혼자였지만 이제는 그를 제외한 일체가 벙어리가 된다. 나머지 모두는 기술이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데이터만으로 스스로를 표출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눈먼 자는 그뿐이었지만, 이제 그를 예외로 한 전부가 눈먼 자가 된다. 어떤 초월적인 것과도 단절한 이후 세계는 자신을 더 많이 중얼거리게 되었지만, 언어와 감각을 잃은 이는 말했듯 가담하는 것과 휩쓸리는 것 외의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세계엔 수數가 넘실대며 흐르고, 데이터는 싱그럽게 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작열만을 듣고 볼 실재의 사막에 도착하고 만다.
가장 마지막의 결산_안동일: 오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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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효력은 결산 후에야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나 모두가 결산이 마쳐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헌법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지 않다고 명시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함유한 피의 농도와 관계없이, 주권은 처음부터 국민에게 있다고 전해졌다. 신체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모두 처음부터 그곳엔 완고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헌법으로도 권력은 자유의 본질부터 부차적인 것까지 모두 다스릴 수 있었다. 거기에는 결산이 필요했다. 충분히 지불된 적 없었기에 발휘된 적 없던 시대의 효력은, 한 발의 총성과 한 움큼의 농성으로, 후불로써 처리되고 나서야 발휘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대가 곧바로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외려 두 개의 시대가 공존하기 시작한다. 영웅이 죄인으로 전락하는 일과 동시에 죄인의 추도식이 현충원에서 열리는 것은 그런 풍경이다. 여직 결산이 필요한 까닭이다. 결산에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결산을 마치는 것은 예술의 일이다. 안동일의 ⟪오발탄⟫이 이미 낡아 바스락거리는 풍경을 현재의 시점으로 담음이란 그런 일인 줄 안다.
저녁은 어떻게 오지_강원제: 선택되지 않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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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제품으로서의 작업은 한 사람의 작가’임’을 증명하기보다는 오직 그가 작가’였음’을 증명한다. 작가는 자신을 증빙해 줄 예술이 등록된 재직 증명서도, 월급명세서도 그리고 명함조차 쉽게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 그는 작업 이후에 외부에서 스스로를 증명할 그 어떤 것도 동원할 수 없다. 작업 이후 작가는 그 어떤 것도 증명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내 소등의 시간을 맞는다. 작업은, 그것이 완성되자마자 작가를 자신이 초대한 한 명의 손님 내지 관객으로 만들고 말았다. 작품이 늘 작가보다 말이 많음은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작가’임’은 오직 생성으로서의 작업, 즉 완료되지 않은 작업으로써 증명된다. 작가의 정의가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일 때, ‘하는’이라는 현재형 시제는 이다지도 엄격한 조건을 이른다. 그래서 작가는 —그가 작가임을 유지하려는 한— 많은 시간을 작업을 완료시키려는 자기 스스로와 다투며 보낸다.
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_뀨르와 타르_RRRRRRRRRRR..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슬라보예 지젝 (11.10.08. 월가점령시위에서)
11이 글의 제목은 뜨거운 감자의 <좌절 금지>의 가사 “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에서 인용했다.
우리에게는 해안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바다는 강으로 흐르지 않기에, 그것이 영영 삶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한다—못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코르크 마개로 닫힌 구원의 글귀나 형상이 있을 것인 한, 의무는 도무지 저버리지 못한다. 마지못해 해안선에 도착하는 비지 않은 병들. 비로소 그 병들을 기다린다. 그들은 각자의 무인도에 제 발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짓고 지은 것을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었냐고는 물을 수 없다. 구원은 절망의 무릎에서 올 리가 없는 까닭이다. 병 안에는, 오직 흘겨 볼 시야와 성토할 입조차 잃은 절망의 나락에서 찾은 것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는 부재하는 목격과 증언을 갈음할 유일한 증거가 담겨있다. 그렇게 그들은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서 선택할 수 없었지만, 단지 어떻게 끝날지는 선택할 수가 있었을 뿐이다. 해안선에 도달하는지 혹은 더 나아가 삶의 근처까지 도착하는지는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도달과 도착을 가지고 실패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멈추는 순간은 실패가 된다.
폭발_백지훈: Non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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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기에 의심이 가해진다 전해지지만, 때로는 확실히 믿기 위해서 절박한 마음으로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도 있을 줄 안다. 그러니 폭발은 미움 없이도 일어나는 법이다. 그것이 산산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저주 같은 동기란 가지지 않고, 외려 그 폭발 이후에도 무언가 남아있기를 바라고 있다. 노도 치는 불길과 귀청을 찢는 폭음에도 기꺼이 버틸 수 있는 어떤 것이 저 재 위와 잔해 아래에 남아있기를.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비로소 본질이라고 할 수 있거나 핵이라고 여겨질 무언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엔 있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치장이나 세련됨을 위하여 겹쳐있었고, 어느새 독을 흘린 것 마냥 악취가 나 그것을 제대로 보는 것조차 힘이 겨운 때가 있었다. 의심하는 자가 생겼고, 믿지 못하는 자가 생겼다. 그러나 믿고 싶기에 폭발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심술궂기보다 말했듯 절박함에 서리어 있다. 백지훈의 ⟪Nontype⟫(비영리공간 싹, 2020.11.14.-27.) 을 보면 그런 마음이 떠올랐다. 분명 여기에 무언가 남아있어라.
우리, 지옥에서 살아요_최수련: 태평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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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아니라고 반하고 싶었지만, 인상착의도 그림자도 없이 체포되는 그를 보게 된다.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물을 수 없다. 찾아온 이가 들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저지르지 않은 죄와 그래서 어떤 혐의인지도 알지 못할 죄에 대해서 혐의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법정은 이 체포만큼이나 맹목적이고 불가항력이어서 소(訴)는 심판이 아닐 길이 없다. 한 치도 순결하므로, 그는 법정에 회부되었음에도 법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출입은 마냥 지연될 것이다. 법이 알려지지 않은 선에서 또 어떤 죄인지 모르는 선에서 그러니까 영원히 맹목적인 한에서만 심판은 공평한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심판이 공평한 연유는 어떤 조건도 없이, 어디도 살피지 않고 공평히 유죄만을 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은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지만 또 어느 곳에도 없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삶의 내내 선명히 있는 심판이다. 미심쩍고 유감스러운 이 법의 이름은 늘 섭리로 불렸다. 매일 새로운 소식에 포함된 무죄한 약자, 타자, 소수자 따위들의 고통도 늘 그런 것이다.
미적 유기체로 아버지_안부: 잘-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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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수 있게 된 이는 영토 밖의 너비와 시간만큼 사투리를 배웠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는 영토를 만든 그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를 아비라고 여길 수 없었다. 이방인은 가정에서 색료 냄새 거두지 않는 곳으로 또 저울 없는 도수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생물적 아비를 부정하고 이념이라는 의붓아비를 섬기게 된 까닭이다. 이 불화로부터 구호 받기 위해서 번역자에게 사정을 해볼 수도 있고, 옛 언어를 더듬으며 교류에 나설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영토 안의 안온을 위한 것이지 사랑하던 그러나 녹아내린 것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은 그에게 건넨 녹아내린 것들을 위하여, 건너에 있는 그가 외려 ‘이방인’이 되도록 영토 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 녹은 것들은 응고될 것이고, 아비 역시 응고된 것이라면 녹아내릴 것이다. 당신은 거기 말고 여기서 아름다워라. 그렇다면 변천을 벗어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빙되는 것이어라.
폐허의 연인_허단비: 영혼의 발돋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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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절망에 비해서 아름답지 않다. 차라리 나는, 연락한다는 말보다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기대했었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보다 거절이 이미 도착했으면 했었고, 그러다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북돋움 대신 남은 것은 불행뿐이라는 선고를 기다렸을 처지였다. 그저 버티지 않고 기대기만 하면, 중력이 이끄는 대로 편히 침잠할 수 있는 그런 평화와 안온이 거기 절망에 있었다. 그것을 마다했던 것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까닭은 아니었다. 도리어 아름답지 않은 것은 희망이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증오스러운 것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패배의 순간은 대부분 추함을 소복이 담고 말기에, 그것은 그 추함으로써 희망을 반드시 떠올리게 했다. 희망이 거기에 있어 기꺼이 포기하지 못했고, 울먹이며 처분을 기다릴 기회를 약탈당하고 말았다. 적은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청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못 하고 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내겐 내내 남는다. 평화와 안온이 그득한 아름다운 절망을 쥘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외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로, 강박적으로 희망에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