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의 질감_박현: thedesert.xyz

Jan Adriaans, ⟪thedesert.xyz⟫, SeMA 창고, 2020,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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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운명에 대답할 수 없는 까닭은, 운명이 말을 걸지 않는 탓이 아니라 운명을 들을 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하여 참견하거나 설득에 나서는 일, 그도 못한다면, 원망을 가하는 일에는 여기선 도무지 돌입할 수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벌어져 버린 사태에 스스로가 맞춰지도록 가담하거나, 휩쓸려 가도록 스스로를 표류시키는 것뿐이다. 어떤 것도 정당화를 되물음하지 않으며, 그 무엇을 이해했는지에 관한 검토는 함구된다. 삶의 실패는 그 어떤 주장으로도 반박할 수 없다. 이 모두는 시장과 경제가 말이 아니라 단지 숫자만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벙어리는 그 혼자였지만 이제는 그를 제외한 일체가 벙어리가 된다. 나머지 모두는 기술이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데이터만으로 스스로를 표출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눈먼 자는 그뿐이었지만, 이제 그를 예외로 한 전부가 눈먼 자가 된다. 어떤 초월적인 것과도 단절한 이후 세계는 자신을 더 많이 중얼거리게 되었지만, 언어와 감각을 잃은 이는 말했듯 가담하는 것과 휩쓸리는 것 외의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세계엔 수數가 넘실대며 흐르고, 데이터는 싱그럽게 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작열만을 듣고 볼 실재의 사막에 도착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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