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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수 있게 된 이는 영토 밖의 너비와 시간만큼 사투리를 배웠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는 영토를 만든 그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를 아비라고 여길 수 없었다. 이방인은 가정에서 색료 냄새 거두지 않는 곳으로 또 저울 없는 도수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생물적 아비를 부정하고 이념이라는 의붓아비를 섬기게 된 까닭이다. 이 불화로부터 구호 받기 위해서 번역자에게 사정을 해볼 수도 있고, 옛 언어를 더듬으며 교류에 나설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영토 안의 안온을 위한 것이지 사랑하던 그러나 녹아내린 것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은 그에게 건넨 녹아내린 것들을 위하여, 건너에 있는 그가 외려 ‘이방인’이 되도록 영토 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 녹은 것들은 응고될 것이고, 아비 역시 응고된 것이라면 녹아내릴 것이다. 당신은 거기 말고 여기서 아름다워라. 그렇다면 변천을 벗어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빙되는 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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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_김학량: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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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_정원석: 할아버지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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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하게와 물끄러미가 어긋나고서야 비로소,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었다. 열지 않는 서랍 속의 드물게 남는 사진처럼 사랑도 무수히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한심한 반복들을 고작 잊고선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을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영원을 부정할 그 말이 준비된 것이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는 비로소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이제까지 ‘영원’이란 낱말이 고비를 맞았던 것은 ‘영원’을 영원으로 맞이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영원은 영원을 지지하고 믿음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부정하고 의심할 때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상징을 다이아몬드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손쉽게 모든 사물에 함부로 부딪쳐 보고 떨어진 파편에 당혹감을 느끼지마는, 사랑을 대추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좀처럼 부서질 것을 알기에 감사하고 조심히 안는다. 현명한 자들과 믿음 있는 자들이 모두 틀려 사랑이 종말의 위기를 맞는다해도, 여전함으로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믿지 못해 떨고 있던 자들의 몫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