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ERD, 김참새 개인전 《영향의 피로》
김참새는 내면의 언어를 색과 형태로 번안한다. 회화와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무형의 감정을 미술이라는 그릇에 담아왔다. 그가 최근 갤러리ERD에서 개인전 《영향의 피로》(4. 6~30)를 열고 ⟨Mask⟩, ⟨Nothing⟩ 연작 등 총 22점의 회화를 선보였다.
갤러리ERD, 김참새 개인전 《영향의 피로》
김참새는 내면의 언어를 색과 형태로 번안한다. 회화와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무형의 감정을 미술이라는 그릇에 담아왔다. 그가 최근 갤러리ERD에서 개인전 《영향의 피로》(4. 6~30)를 열고 ⟨Mask⟩, ⟨Nothing⟩ 연작 등 총 22점의 회화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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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버지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이야기,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일, 한 사람의 마음엔 한 사람 이상의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보는 일, 그리고 사랑이 죽음으로써 끝난다 해도 사랑의 주검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오래전 내가 읽은 체, 알은 체하고 눈 돌렸던 모든 장면들이 시간도 장소도 심지어 기억도 없이 살아와 끝내 희망을 선물한다. 나는 올 한 해 울지 않았기에 선물을 받는 것이겠지. 그러나 울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순응하고 타협했다는 말과 다른 점이 없지 않을까. 나의 절망을 남에게도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그것을 희망이란 그럴싸한 말로써 그저 삼킨. 어째서 눈물을 흘리지도, 엄격하지도, 책망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끝끝내 당신을 미워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나. 그러니 내가 예찬해야 할 대상은 이제 부정적인 것들이다. 더는 희망을 찾지 않으면서 그리고 이해를 찾지 않으면서 절망과 미움으로써 미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벗은 그 무서운 독을 그만 흩어버리라 하겠지만,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며, 독에 구원이 있다고 믿어보는 일에 나선다. 예술의 한편은 다시 그곳에 종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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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부르는 표정. 당신도 한 번쯤은 부르거나 대답해본 적이 있겠지. 당신이 나의 표정을 읽고 나는 혀로써 당신이 읽은 것이 맞다 대답하는. 내 과거를 대신 기억하는 안색에 대해, 내 슬픔을 대신 앓는 낯빛에 대해, 나 대신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얼굴에 대해 그러니까 대신하여 어떤 소리를 기다리는 표정에 대하여. 이들을 마주친다면 나는 비로소 고백할 준비가 끝날지 모르겠다. 괜찮냐, 어떻냐는 물음이 마치 열쇠가 되어서 그 열쇠에 꼭 맞는 말을 발음하는 일도 있지만, 그 표정들은 물음 없이 도착해 나는 그것에 맞는 어떤 소리를 뱉고 또 발음할 준비를 마치고 만다. 건네는 대화 안에서 몇 개의 말이 겨우 남을까 하는 고민. 그러나 그 열쇠를 통해 소리가 당신의 안으로 안착한다면, 굳이 구석진 자리에 앉지 않아도 또 천천히만 식는 커피가 도움을 주지 않아도 언어의 온도가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다. 고백을 하고 밤사이 뒤척였던 것은 당신의 입에서 ‘아니’란 말이 나올까보다는, 내가 두드린 계이름과 말이 정확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다만 네 입속에 내 잎을 넣어 그것이 자라나고 흔들리는 순간 염려는 없었다.
미술은 모든 요소들이 동시에 보이도록 그려진다. 그림을 보는 이가 각 부분을 살피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림 전체의 동시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술은 보통, 시간예술이라는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 중에선 평면에 시간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존재한다. 이번 컴필레이션은 그러한 시도를 담는다. 그림의 개체를 다르게 정의하는 것, 개체 윤곽이 불투명해지거나, 왜곡되는 것은 모두 존재가 생성이 되는 것으로써 시간을 갖는다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째서 문제일까. 고정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은 그것이 어디서부터(과거) 지금에 도착해있고 또 어디론가(미래)로 흘러갈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앞당기는 것을 통해서 현재를 다시 극복하려는 힘을 지닌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현재는 과거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자, 다시 미래를 위해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된다. / 조재연
9/14 「원은 회전하는 점」_박영준, ⟨곰곰⟩
9/15 「모든 것은 흘러내린다 1」_이해민선, ⟨봉우리⟩
9/16 「모든 것은 흘러내린다 2」_정희승, ⟨큰 폭포⟩
9/17 「반복이 아니라 번복」_박영준, ⟨패턴 16⟩
9/18 「하지만 몇 시인가요」_고현정,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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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내내 났지만, 아침 안개가 그것을 머금곤 해가 뜨자마자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괜히 타고난 자리, 지글지글 끓던 곳을 정말 다 타버렸을까 보았을 때 그 자리엔 그을음조차 없었지만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통해서야 기억할 수 있던 것이었고, 기어코 사진조차 없이도 선연히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가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날 밤, 나는 어렴풋한 것들을 내어준 대신에 지울 수 없는 것들을 새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게 망각만이 내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파열의 발견만이 내가 어디서 온 이가 아니라,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이임을 알려주었다.
예술이 곧 정치는 아닐 것이다. 붓이나 펜을 잡는 것으로 혹은 미술관의 문턱을 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이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한에서 예술이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벗어나야 하는 것은 정확히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논리다. 예술은 그 현실을 보는 다른 논리, 다른 시선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삶과 연결됨으로써 정치적이게 된다. 정치가 다른 삶을 발명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리는 미술이 어떻게 정치의 개념을 건네는지, 어떤 식으로 정치를 미술에서 읽어낼 수 있는지를 볼 것이다. / 조재연
7/6 「행복은 절규」_이승주, ⟨이상한 나라⟩
7/7 「속세는 숭고」_이우성, ⟨당신은 왜 산에 오르십니까?⟩
7/8 「권능은 역량」_우정수, ⟨캄 더 스톰⟩
7/9 「중심은 주변」_최요한, ⟨Q_Fungi⟩
7/10 「블루는 화이트」_방성욱, ⟨Green Collar Wor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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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잠언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의심쩍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전하며 늘 오늘을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자랑스럽게 논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낱말을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죄책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요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이때 ‘시간’은 적금 만기일이 도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타임라인 혹은 타임 세일이라는 행사 속에 종사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소실하는 일은 ‘지금’이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항 사이에서 도려낼 때 야기된다. 시간은 모순적인 관계항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재를 따로 도려낼 때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는 현재를 획득하긴커녕 시간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에 연루하게 된다. 과거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이후’—80년 5월 이후나 14년 4월 이후와 같은—라는 기준점을 가지고 그러한 과거에 대한 부정과 지양이라는 관계에서 위치한다. 반면 미래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현재에 존재해야 했으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을 위한 시간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지양을 수행하는 관계에 놓인다. 결국 과거와 미래라는 항을 놓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지금의 세계가 과거와는 달랐고 또 미래에 역시 달라질 것이란 세계의 변혁 가능성을 견지하는 일이며, 존재에게는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에 믿음을 보태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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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이도 사랑받은 이도 결국 파멸로 끝을 맺는, 구원이라고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비제의 <카르멘>에서 니체는 완전하게 구원된 무언가를 찾아내 소리 낸다. 그것은 다른 모든 인물들이 파멸했기에 오히려 구원될 수 있었던 혹은 파멸로부터 달성된 자연적 사랑이다. “결국에는 사랑을, 자연으로 다시 옮겨진 사랑을! ‘고결한 처녀’의 사랑이 아니고! 센타의 감상도 아닌! (…) 바로 그래서 그 사랑에는 자연이 깃들어 있는 겁니다.”(『바그너의 경우』) 인간이 진행하는 사랑보다 인간의 주검 뒤에 의미만이 남은 사랑은, 그리고 의미보다 ‘자연’이 강조된 사랑에서 이러한 증명은 반드시 인간으로 구성된 주체의 역사에서 주체인 인간을 패퇴시키고, 자연(적 사랑)이란 주체의 입회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란 주체에 종속된 ‘사랑’은 비로소 …의 사랑이란 소유격을 벗어나 오롯한 의미를 되찾으며 그로부터 자연은 소생한다. 그렇게 실천에서 주체가 해소될 때, 의미는 강조되며 억압되었던 것은 부활하거나 회생回生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