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실연이 알고 있는 혁명_다자이 오사무: 사양(斜陽)

Gerhard Richter, Betty, 1977

두 개의 문장이 있었다. 하나는 1845년 봄에 마르크스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 쓴 것이며, 다른 하나는 1873년에 랭보가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 1」)라고 적은 것이었다. 문장은 작가보다 말이 많아, 장르도 목표도 다른 두 명제는 각기 창궐하면서 마침내 조우하여 새로운 명제를 만들어냈다.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하여 삶은 바꿔야 하며, 삶을 바꾸기 위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내 사랑이 불현듯 유산된 것은 ‘새’ 사랑을 납득하지 못하는 세상 때문이니 다시 말해,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즉각 응답한 것은 예술을 혁신해야 한다고 했던 아방가르드였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이 명제는 삶에 어느 언저리에서도 정치를 그리고 대문자로 쓴 정치일지도 모를 ‘혁명’을 기어코 찾아내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 씨팔 이게 다 세상 때문이야 라고 할 수 있게 된 거다.

이별과 실연이 알고 있는 혁명_다자이 오사무: 사양(斜陽) 더보기

메리 크리스마스, 유다_보르헤스: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Andres Serrano, , 1987

⎪ “타락에 확신이 있는 듯 했다.” -토머스 E. 로렌스

1
언제부터야? 배신을 마주한 사람은 이 말의 주인이 되는 것을 늘 피할 수 없다. 그 주제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그 시점으로부터 모든 스스로를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때 상대는 그 말을 망설였었구나, 불필요했던 그 행동을 해야 했구나 하면서. 이제 그가 이해했던 것은 그가 제일 잘한 ‘오해’가 되고, 그가 했던 미안한 오해들은 그가 제일 잘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가 쥔 결과물들이 사실은 거짓된 결론들이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배신이란 ‘사건’의 서사를 파악하며 인정할 수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유다_보르헤스: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더보기

언어의 배반 -조지프 콘래드 비평으로부터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연>은 진보적인 작품이다. 문명의 저편에 존재하는 어둠의 심연을 찾아 떠나는 말로우의 여정 속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위선과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은 철저하게 고발되며, 근대 유럽의 문명이 낳았다고 표현되는 ‘위대한’ 커츠 대령의 어둠과 동화되어 변태된 모습은 유럽 식민주의가 은폐하는 문명의 이중성과 야만을 반성하게 한다. 소설이 갖고 있는 식민주의에 대한 고발과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근대를 지탱하고 추동시켜온 계몽정신-이성-의 야만성을 드러낸 이러한 전복적 시도들은 작품의 진보성을 입증시키는 데 성공한다. 분명 소설은 당대 어느 문학에서도 찾을 수 없는 비판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둠의 심연>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콘래드는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문학 작가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1975년 나이지리아의 유명 비평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로부터 소설의 진보성은 추락한다. 아체베의 비평 속에서 콘래드는 당대의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여전히 그가 발붙이고 있는 지면은 식민사관임이, 여전히 그 곳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이 노출된다. 그가 백인 여성을 대상으로 “애도 중이었다.”라든지 “성숙한 충정과 신뢰 그리 언어의 배반 -조지프 콘래드 비평으로부터 더보기

느낌의 거리_문학의 이유

이중섭, <물고기와 동자>, 종이에 콘테, 10.1×12.5cm, 1952

이해한다는 말은 애초에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말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 말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내가 너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는 다행스러운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같아 질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의 간극만큼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못한다”라는 문법이 존재하고, 그 간극에 실례를 구하며 이해를 ‘양해’라는 말로 고쳐쓰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네가 나같아 질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그래서 상대를 나와 같게 만들려하거나, 상대를 나에 비추어 평가하려고 한다. 이 망각은 단순히 너와 내가 다르다는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 망각은 처음부터 ‘이해한다는 말’과 ‘같아진다는 말’의 목적지가 행동이 아니라 느낌을 향해있기 때문에, 그러나 늘 행동을 향해 걷고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느낌의 거리_문학의 이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