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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어머니께서는 청력이 좋지 못하셨습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여기서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듣는 많은 소리를 듣지 못했고, 내가 건네는 말들은 늘 희미해진 후에야 가닿았다. 같은 것을 듣지 못할 때면 나는 내가 듣는 것을 스스로 의심해야 했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면 반드시 전해진다는 말은 믿음 잃은 동화처럼 들렸다. 학년이 바뀌면 나는 친하게 지내던 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나의 느낌과 기억이 그와 같을 것이란 생각은 도무지 책임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해의 층위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그렇게 나는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롭다는 말은 아끼기로 했다. 결국 서로에게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결론 앞에서도, 이해를 그치지 않는 일들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또 일상적 언어가 이해에 부침에 겪을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일들이 남아있는 때까지는. 쉽게 외로워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론보다 결심에 더 가까운. 예술은 그런 한에서 내 이야기 같았다. 나희덕이 마크 로스코의 <No.16>(1958)을 보고 쓴 시 「마크 로스코」(『파일명 서정시』, 2018)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마음을 소등한 자에게만 보이는/희미한 빛은/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비극을 두제곱한다. 그는 자신의 등불로는 타인의 느낌과 의미를 비출 수 없다는 결론을 알기에 이내 등을 끄고 말았다. 첫 번째 비극이다. 그러나 등이 꺼져 주위가 어두워지자, 마침내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예술의 빛이다. 그러나 결국에 그 역시 “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제곱 된 비극. 하지만 그에게 이제 그러한 결론은 중요치 않다. “벽이 못을 간신히 삼키듯” 이미 그는 결심했으므로. “누군가에겐 순진해 보이더라도 이해에 가닿을 것이라는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이 제 삶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예술과 가까운 삶만이 저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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