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대오_오민수의 설치

오민수 〈아웃소싱 미라클〉 스피커, 모터 외 혼합매체 가변크기 2020

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
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
― 심보선, 「예술가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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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가장 구태스러운 질문이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만들어낸다. 오민수의 예술이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느꼈다. 우리에게 그의 설치는 넓은 의미의 ‘참여’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옹호처럼 보인다. 화염병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예술은 화염병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긴장을 포기하면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이 자명한 명제는 예술이 더는 현장을 찾지 않은 채로도 다툼을 만들어내는 완숙한 닻이 되어주었다. 구체적인 현안은 이제 예술의 대상이 아니니, 예술은 그저 실재에서 물러나 그것을 주조하는 형이상학과 싸워야 할 몫을 갖는다는 것. 건설 노동자의 분신 대신에 인간 소외를 은유하는 알레고리, 구축 당하는 빈민 대신에 폐허의 미학을 건설하는 멜랑콜리적 구성, 정부의 언론 장악 대신 어떤 표현도 가능한 초현실적 세계관의 구축…, 이들은 현안에서 물러나지만 갈음을 통해 총체성에 닿는다. 장기적으로 혁명은 이 총체성 위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우린 미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비판이 감미롭게 들리고 가장 안전한 단어로 변모할 때, 창작은 정치를 심미화하는 데 그친다. 혁명을 노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최종심에 다다를 때까지 예술은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오민수의 예술은 여기에 대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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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이여, 다시 한 번_황예지의 사진

황예지 〈마리아〉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40×60 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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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서정’이 있다. 서정은 이제 충분하다는 얘기다. ‘일상’이라는 터전, ‘내면’이라는 수단, ‘자연’이라는 이상을 꼭짓점 삼은 삼각형에 안착한 서정은, 더 이상 스타일이기보다 메커니즘으로서 소진된다. 주변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보고 보듬는, 그로써 진부한 하루에서 특별하고 소중한 감동을 낚아 올려 깨달음에 도달하는 서정의 논리는 미술 안에서 형식으로서 반복되거나, 혹은 미술 그 자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다음에도 삶은 도무지 특별해지지 않는다. 서정 위에서 깨달음이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미적으로 아름답기는 쉬워도 위협적이지 않은 까닭이다. 삶의 진실은 그러니까 진리는 늘 위협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아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삶을 새로이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놔두고, 미처 자아가 눈치채지 못한 것을 발견하면 될 뿐이라며 진실로부터 물러서는 것. 그러니까 세계엔 잘못이 없고 그저 자아의 깨달음이 문제였다는 헌신적이다 못해 숭고한 반성의 점철. 이때 서정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을 향유하는 것으로써 부조리와 동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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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욱: 은유의 리얼리즘

아트사이드갤러리, 화가 최진욱 개인전

최진욱 〈430.렌트 7〉 캔버스에 아크릴릭 193.9×510cm 2023

최진욱은 개인의 경험을 기록한 풍경으로 동시대 사회를 담는다. 감각적인 색감과 은유적인 이미지로 익숙한 일상을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 밀착한 문제의식을 회화적 정치성으로 풀어왔다. 그의 개인전 <창신동의 달>(3. 14~4. 13)이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창신동, 인왕산, 동해, 작업실 등의 정경을 담은 그림 19점을 선보였다. 개별적인 건물, 장소, 오브제를 하나의 장면으로 연결해 미시사와 거시사의 연속성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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