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딜 곳 없는 사다리>(4. 6~5. 1 드로잉룸)를 보며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2009)을 떠올렸다. 여기에는 기둥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수많은 애벌레가 등장한다.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이하 줄무늬)가 여정의 이유를 묻자 누군가 답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틀림없이 굉장히 기막힌 것이 있을 거야.” 이에 수긍한 줄무늬는 다른 애벌레처럼 남을 짓밟고 밀치면서 기둥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만을 깨닫는다. 줄무늬는 기둥을 내려오며 이 사실을 전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다수에게 진실은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쁨보다 자신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이었다.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닌 날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줄무늬는 비로소 나비가 된다. 여기서 ‘꼭대기’는 더 이상 기둥의 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먹고 자라는 것보다 더 나은 생활이 분명 있을 거라던 줄무늬의 꿈에 가깝다. 삶에는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남을 짓밟고 밀치며 오르는 경쟁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그런 한에서 ‘디딜 곳 없는 사다리’는 상승을 소망하는 이에게는 서글픈 낱말일지 모르나, 삶을 달리 보는 이에게는 어떤 비관도 개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려 희망에 어울린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이자 사진작가 안부의 출품작 <겹>(2020)은 ‘오르기’보다 ‘밀기’에 적합해 보였다. 작업은 위계를 갈망하며 세계의 높이에 다가가기보다는 삶의 너비를 재기 위한 바퀴를 지닌다. 줄무늬는 정상에서 추락한 애벌레의 주검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오르기를 포기하고 쌓인 의자를 내려놓으면, 우린 눈을 맞추며 함께 앉아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동화의 말미에서 다른 애벌레 역시 지상으로 내려와 나비가 된다. 두려움을 확신으로 바꾼 건 이런 문장이었다.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는 여기 함께 앉을 테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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