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 없는 마음

인간의 감정이 결국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서글프다. 시곗바늘 대신 심장 소리가 좁은 방을 채웠던 숱한 새벽이 고작 물질 기관의 일이라면, 우리에겐 예술보다 신경 전달 물질을 조절할 향정신성 의약품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김학량의 개인전 <짱돌, 살구 씨, 호미>(5. 5~6. 5 전주 서학동사진관)를 나오며 서두에 했던 말을 취소하기로 했다. 전시는 제목처럼 소담치 못한 사물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겼다. 서사도 색면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도 부러 지어냄 없이 오직 사물의 실체로만 구성되는 그림. 그러나 그 실체 때문에 사물은 추상의 낱말보다 마음을 더 정확하게 발음한다. 감정은 개체 내부의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자주 그리운 누군가에게 물들어갈 때, 함께 있는 동안 그 애틋함에 타일의 먼지처럼 흔들릴 때, 불안이 혓바늘처럼 움틀 때면, 물듦, 먼지, 흔들림, 바늘, 움틂이라는 외부에 놓인 물질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선 마음은 도무지 스스로를 고백할 수 없다. 김학량의 그림은, 말재간 없는 감정이 빌릴 사물을 인간의 사전에 추가한다. 나는 마음 어딘가 이름을 지니지 못한 감정에 짱돌, 살구 씨, 호미를 빌려와 발음해본다. “발견한 사물을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반대로 사물에게 나를 들켰다.” 작가가 들킨 것은 사물을 닮은 마음이었을 테다. 감정이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보다, 누군가의 감정에 정확히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이 나를 더 서글프게 만든다. 이해받지 못한 이가 있을 때면 예술은 늘 사물의 처소를 찾았다. 그러니 오해를 면치 못할 일이라 해도 헌신을 그칠 리 없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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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_김학량: 벽화

김학량, ⟪벽화⟫, 별관,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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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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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알러지 잠수함_김학량: 바다와 나비

김학량, ⟪바다와 나비⟫ 전시 포스터, 상업화랑, 2020.2.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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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기다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세상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다음에’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럼 나는 시계 앞으로 가, 시곗바늘만 빤하게 쳐다보았다. 째깍째깍 뚝뚝 끊어지며 가는 초침보다는 친구 집에서 본 부드럽게 움직이는 초침의 시계가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집에는 그런 시계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시계를 계속 쳐다보면 그는 부끄러워서 다음 시간으로 갈 수 없을 거라고.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나이였고, 누군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평소에 눈감고 하던 것들도 실수했었기에 그가 부드럽게 침들을 옮기지 못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침이 한 바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그가 안심하고 바늘을 옮길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것은 나 같은 이가 또 있구나 하는 유형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부끄럼 많은 그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해야 하는 나를 위해서, 나는 한동안 우리 집에 누구도 초침이 한 바퀴를 도는 직전에는 시계를 보지 못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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