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적_임동식: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2020. 8. 19~11. 22 서울시립미술관) 포스터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 최규석, 『송곳』 2권(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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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사과가 한두 개씩 떨어지는 일은 발붙인 존재들의 숨을 멎게 하기 위한 것. 달이 창백한 것은 짐승의 안광을 번뜩여 적당한 피부를 오리려는 출혈의 산물이기 때문. 인간의 피가 붉은 것은 자연엔 초록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수명壽命의 끝에서 땅이 굶주림을 채우고, 그 굶주림이 시간에 따라 이뤄지지 않을 때면 부러 재해 같은 상사喪事를 지어낸다. 이 독을 찬 묘사는 자연을 향한 것이다. 오만한 인간은 자연의 일이 인간을 양육하고자 행해진다 여기어 그들의 과실만을 취하려 하고, 조금이나마 지혜를 얻은 인간은 자연의 악은 장막으로 감추고, 그 자애만을 기억한 채 교류에 나서려 하겠지만, 이 중 어느 입장으로도 자연의 존엄은 발생하지 않는다. 자연의 존엄을 바라는 일은 도무지 자연의 악을 강조할 때 그래서 그들이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여겨질 때 가능하다고, 나는 조금씩 생각해 보고 있다. 아름답지도, 생기로 멋 부려지지도, 인간을 껴안을 너른 품을 자랑하지도 않는, 임동식이 그린 자연을 보고선 그곳에 초조히 목을 내놓고 기다리는 인간을 발견한다. 반성은 인간의 버릇. 더는 그것에 흔들리지 않으니 으름장. 그걸 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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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의 질감_박현: thedesert.xyz

Jan Adriaans, ⟪thedesert.xyz⟫, SeMA 창고, 2020,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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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운명에 대답할 수 없는 까닭은, 운명이 말을 걸지 않는 탓이 아니라 운명을 들을 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하여 참견하거나 설득에 나서는 일, 그도 못한다면, 원망을 가하는 일에는 여기선 도무지 돌입할 수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벌어져 버린 사태에 스스로가 맞춰지도록 가담하거나, 휩쓸려 가도록 스스로를 표류시키는 것뿐이다. 어떤 것도 정당화를 되물음하지 않으며, 그 무엇을 이해했는지에 관한 검토는 함구된다. 삶의 실패는 그 어떤 주장으로도 반박할 수 없다. 이 모두는 시장과 경제가 말이 아니라 단지 숫자만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벙어리는 그 혼자였지만 이제는 그를 제외한 일체가 벙어리가 된다. 나머지 모두는 기술이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데이터만으로 스스로를 표출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눈먼 자는 그뿐이었지만, 이제 그를 예외로 한 전부가 눈먼 자가 된다. 어떤 초월적인 것과도 단절한 이후 세계는 자신을 더 많이 중얼거리게 되었지만, 언어와 감각을 잃은 이는 말했듯 가담하는 것과 휩쓸리는 것 외의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세계엔 수數가 넘실대며 흐르고, 데이터는 싱그럽게 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작열만을 듣고 볼 실재의 사막에 도착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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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지막의 결산_안동일: 오발탄

안동일, ⟪오발탄⟫, 상업화랑, 2020,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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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효력은 결산 후에야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나 모두가 결산이 마쳐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헌법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지 않다고 명시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함유한 피의 농도와 관계없이, 주권은 처음부터 국민에게 있다고 전해졌다. 신체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모두 처음부터 그곳엔 완고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헌법으로도 권력은 자유의 본질부터 부차적인 것까지 모두 다스릴 수 있었다. 거기에는 결산이 필요했다. 충분히 지불된 적 없었기에 발휘된 적 없던 시대의 효력은, 한 발의 총성과 한 움큼의 농성으로, 후불로써 처리되고 나서야 발휘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대가 곧바로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외려 두 개의 시대가 공존하기 시작한다. 영웅이 죄인으로 전락하는 일과 동시에 죄인의 추도식이 현충원에서 열리는 것은 그런 풍경이다. 여직 결산이 필요한 까닭이다. 결산에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결산을 마치는 것은 예술의 일이다. 안동일의 ⟪오발탄⟫이 이미 낡아 바스락거리는 풍경을 현재의 시점으로 담음이란 그런 일인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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