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이미지·이미지_유숙형, 임주언: 경계의 파편

유숙형, 임주언 《경계의 파편 : 이미지의 유영》 전경 4. 11~5. 10 보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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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림이 앞으로 튀어나오진 않는다. 회화의 깊이와 재현의 성취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예컨대 회화가 무엇인가 등장하는 장면을 그려낼 때 그것은 1차원의 이미지다. 그런데 모든 이미지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선택과 조율을 통해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화면은 한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재구성한 2차원의 이미지로 다시 규정될 수 있다. 뿐인가. 이미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해석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장면을 받아들일지 혹은 그 배면을 톺아야 할지를 감상자가 판단해야 하는 이미지, 다시 말해 해석을 요청하는 이미지는 3차원의 것이 된다. 나는 지금 유숙형, 임주언의 《경계의 파편: 이미지의 유영》이 지닌 세 개의 차원을 말하고 있다. 평면이라 할지라도 작품은 결과 겹을 지닌다.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1, 2차원의 회화로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산적해 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모든 개별적 사건이 웹을 통해 즉각 공유되는 시대에 새로운 내러티브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획일적으로 살고 있기에 내면을 돌아본들 독자적으로 고백할 것 역시 딱히 없다. 3차원의 회화는 이때 등장하기 시작한 것 같다. 타인도 자신의 이미지도 아닌, 단지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회화. 전시의 표제를 빌리자면 이른바 유영游泳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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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두 회화가 무엇이 진실인지 고민하고 이를 어떻게 표현할지를 배우고자 이미지를 탐구했다면, 세 번째 유형의 회화는 이미지가 그저 재료이기 때문에 천착한다.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점과 선, 면의 조합일 뿐이다. 작가는 이제 ‘이미 그려진 것을 어떻게 다시 읽을 것인가’로 관심을 옮긴다. 풍경이나 인물을 재현하기보다 기왕의 이미지가 지닌 틀을 뒤집거나 젖히고, 익숙한 장면의 구조를 낯선 방식으로 되묻는다. 회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이 장면은 왜 이렇게 보이도록 구성되었을까?” “이 이미지에서 빠진 것은 무엇인가?” “왜 나는 이것을 자연스럽다고 느꼈을까?” 물음이 다만 패러디에 그친다면 작품이 지닌 가치는 ‘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개입은 이미지 너머의 권력 구조를 드러낸다. 내러티브가 없는 그림에서 대상 사이에 인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지한 존재가 죽어있다 볼 필요가 없고, 날아오르는 존재가 추락한다 여기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단단한 벽과 대지가 흐물거리지 않는다 믿을 필연성이 없다. 감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해체. 그래서 이 회화들은 도무지 닫히지 않는다. 누가 열린 장면을 소유할 것인가. 이야기의 주인은 관객이다. 보는 이의 감각과 기억, 그러니까 새 주인의 해석이 화면을 열어젖힌다.

왼쪽 · 유숙형 〈CAM 3-Loon〉 캔버스에 유채 90.9×72.7cm 2025 / 가운데 · 〈CAM 2-Loon〉 캔버스에 유채 90.9×72.7cm 2025 / 오른쪽 · 임주언 〈Screen〉 캔버스에 유채 53×72.7cm 2025

임주언은 감각의 균열을 언어로 삼는다. 작가에게 이미지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어긋나는 순간을 추적한 결과다. 화면이 어긋나고 얼굴은 잘려 나갈 때, 배경은 단절되고 시선이 뒤틀려 뼈가 드러나듯 색 방方이 제 그릇을 드러내는 찰나…. 서사는 파괴되어 있다. 조각은 부서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이 고작 암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들킨다. 그 애애한 대리석은 파편이 된 뒤론 나뒹구는 돌부리와 다를 바 없다. 돌부리의 낯 모두가 우연이듯 임주언의 이미지에 필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의 형태를 의심하는 언어, 무언가가 되지 못한 유예된 공동체다. 관람자는 이 파편 앞에서 시선의 익숙한 규칙을 내려놓고 새로운 감각의 방향을 발명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나는 아무렇게나 그의 그림을 본다. 〈더미 연구〉 연작의 치어리더는 사실 인간이 아닌 기후 재난으로 발버둥 치는 자연을 격려하는 존재다. 제 팔을 가지처럼 펼치고 손에 든 술이 잎사귀에 가깝다는 점에서, 형상이 인간의 명료함보다 대지의 모호함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게 그 증거다. 〈실패한 파노라마〉의 경주마는 노동 운동의 화신이다. 길게 늘어진 목, 잘려 나간 다리는 속도, 경쟁이라는 신화를 전복한다. 끊임없는 운동과 성과를 강요받아 온몸이 자신을 착취하는 장치에서 이탈하고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의 말이 옳다. 그림은 무언갈 말하는 대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줄 테니.

임주언이 이미지를 파쇄해 내러티브를 유예한다면, 유숙형은 시선에 막을 덮어씌움으로써 이야기를 유예한다. 전자가 감각이 어긋나는 순간을 좇았다면, 유숙형은 감각이 스며들기 전에 얼룩에 이야기가 가려지도록 그늘을 내린다. 화면은 분명 어떤 장면을 닮았지만 그것이 ‘이해’되기 전에 불투명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작가의 임무는 개연성을 통해 개별을 특수로, 특수를 보편으로 승화하는 데 있다. 유숙형은 반대로 향했다. 어디서나 겪어보았을 일은 화면에서 어디에도 없을 사건으로 전락한다. 그는 우리가 알던 것을 비로소 모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숙형 회화는 재인식이 아니라 최초의 인식이다. 〈CAM-Loon〉 시리즈는 일견 감시 장치, 즉 기계의 눈에 포착된 피사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회화가 드러내는 건 카메라를 응시하는 박제된 새의 시선이다. 그 응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시선, 말하자면 감지된 이미지가 우리를 바라보는 감각이다. 회화는 이때, 더 이상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는 통로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 인간을 관찰하는 반사면이 된다. 〈가끔 이런 걸 확대해 볼 때가 있다〉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인물은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제야 깨닫고 있다. 매끈한 반사면은 오래전부터 말하고 있었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기도 전에, 세계가 이미 인간을 반사해 내는 것처럼. 우리는 어디에도 없던 사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눈에 어린 우릴 처음으로 만난다. 이 이야기가 온당하지 않다면? 어쨌든 당신은 모른다.

위 · 임주언 〈더미 연구 1〉 캔버스 유채 90.9×72.7cm 2025 / 가운데 · 〈더미 연구 4〉 캔버스에 유채 2025 / 아래 · 〈더미 연구 2〉 캔버스에 유채 90.9×72.7cm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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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의 작업이 함께 놓인 전시 장면에서 마무리 짓자. 임주언이 서사를 파쇄하고 해석의 틈을 드러낼 때, 유숙형의 화면은 그 틈에 막을 씌워 해석을 유예한다. 무엇이든 답을 ‘댈’ 수 있으나, 무엇이든 답이 ‘될’ 수는 없는 상황. 전자는 감각이 부서지는 순간을 조각하고, 후자는 그 조각에서 인간 아닌 사물의 응시만이 가능하도록 빛을 거둔다. 파편과 안개, 균열과 막, 손실과 유예…. 두 회화는 나란히 서로를 더욱 불명료하게 만들어서, 이미지를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로 다시 그것을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로 거듭해 제곱을 해나간다. 유숙형의 시선 아래에서 임주언의 파편은 눈을 지닌 조각이 되고, 임주언의 틈 위에서 유숙형의 유예는 기약 없는 시간을 얻는다. 유예는 늘 ‘나중’을 예정하겠지만, 이 배치에선 영원히 미끄러지며 차연différance을 만들 테다. 숱한 예술이 쓰이고 그려진 뒤에도, 예술이 여전히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면 결국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서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노라고. 작가는 이미지라는 이야기를 제 뜻대로 쓸 수 없고, 우리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제 뜻대로 쓸 수 없다. 어쩌면 운명이나 신, 화폐가 쓴 이야기의 출연자로서 태평양을 표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누군가에 의해 이미 쓰인 이 이야기(이미지)를 어찌할 것인가. 유일한 방법은 내가 그 이야기의 새 주인인이 되어 그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길뿐이다.

이는 이미 완결된 세계에 금을 내고, 다른 세계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실천과 궤가 같다. 생을 다시 쓸 것인가, 세계를 다시 창설할 것인가. 《경계의 파편》이 하는 일은 이런 것이다. 전시가 어떤 의미도 확정돼 있지 않다고 확언하는 까닭이다. 전시는 표류를 ‘유영’으로 바꿔낸다. 유영하는 인간은 길을 잃는 법이 없으니. 이건 시험이 아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다시’ 이야기한다면 우리(세계)는 늘 더 나아질 것이다.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왼쪽 · 유숙형 〈빌어놓은 희망 들여다보기〉 캔버스에 유채 97×97cm 2025 / 오른쪽 위 · 〈가끔 이런걸 확대해 볼 때가 있다〉 캔버스에 유채 37.9×37.9 cm 2024 / 아래 · 〈미니 게임 스타트〉 캔버스에 유채 37.9×37.9cm 2024

참조
신형철,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pp.195~204.
―――, 「신은 소설을 읽지 않는다」, 『문학동네』 제23권 제4호, 2016, pp.566~596.
윤동주, 「눈감고 간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 2022, p.36.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경험과 빈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길, 2008, pp.169~180.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플롯의 필연성과 개연성」, 『시학』, 현대지성, 2021, pp.35~38.

◼︎ 보다갤러리 《경계의 파편》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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