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풍지경초 엄상식정목(疾風之勁草 嚴霜識貞木)〉에 숨어 있는 화자는 들판에 서서 초목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있다. 직선으로 뻗은 동선에서 벗어나려는 듯 사방을 향해 흔들리는 그들은 스스로가 꼼짝 않고 응시하던 어떤 것에서 멀어지려 한다. 풀이 누웠다 일어나고 가지가 얼고 녹는 반복이, 제목이 지시하는 거센 바람(疾風)과 늦가을 서리(嚴霜)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통념을 벗어나는 관찰이라 볼 수 없다. 이때 시선은 초목을 제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날씨라는 상투적인 인식 아래서, 바람과 서리가 그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시킬 뿐이다. 그러나 김효진은 상황을 달리 명명하고 있다. 그림은 풍경을 고정된 방향으로부터 내쫓는다. 곱지 않은 날씨가 처소에 도착하는 동안, 화자는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린다’와 ‘풀이 눕고 나무가 언다’를 선후관계로 파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관계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는 것일 수도 있고, 나무는 서리보다 먼저 얼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작가는 이 풍경을 이름할 때 주객의 방향을 반대로 뒤집어 놓는다. 풀에 도달하는 바람 대신 바람을 좇는 풀, 나무를 결빙하는 서리가 아닌 김을 얼리는 가지. 예술은 통념을 해체하고 거기에 혼돈을 들어 앉힌다. 이 가을의 초목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신이다.
이제부터 나는 은밀한 소란과 야단한 고요를 거닌다. 고요와 소란이 서로를 디디어 자신을 이룩하는 때. 지나치게 많은 잎으로 고정되지 않는 형상과 색은, 밤과 낮의 구석구석을 바꾸어 놓으며 먼 곳으로부터 더욱 먼 곳까지 통과한다. 내 고통이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여기에 움직이는 것은 없다, 고 여긴 순간 내가 푸르게 물들 때까지, 파르르 떨릴 때까지 질주에 나선 그를 발견한다.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 라고 묻지 않고 외려 시간을 향해 나아가는 그는 너무 낯설어 나를 닮는다. 그러니 고백을 준비하듯 또 탄약을 장전하듯 말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멈추어 있고 대신 길이 걸음하는 사이, 겨우 기상을 벗어난 초목이 다시 흐린 날을 받아들인대도 허무는 도착지가 아니다. 나는 잎과 가지가 결코 소리 낼 수 없는 〈우당탕퉁탕〉을 그들의 웃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일기를 앞서가는 존재의 기적이 있다면, 기적 같은 소리 또한 없을 리 없다. 다시 사랑과 혁명은 태어날 테고, 거듭 실패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이러한 사건 뒤에도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은 상황과 마주해 무력감에 몸서리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수락하는 운명애는 자유로운 존재의 투쟁 방식이다. 날을 붙잡으려고 피어난 부채살들.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기 즐거움이 있는 게 틀림없다.
2
흔한 풍경이다. 풀과 나무, 물, 하늘 등 《에코의 초상》이 펼치는 대상은 장르의 규정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 비근한 풍경에 새로운 시선을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할까. 그러나 김효진은 아마도 보는 이가 예사로운 풍경에 충격을 받게 되리라고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풍경다운’ 풍경을 얻는답시고 마치 고도에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현실을 피해 얼마나 멀리 도망치려 했을까. 그곳에 구름이 있다 한들 그것을 진정으로 평화롭게 마신 적이 있을까. 여기 풍경이 있다. 다만 이 풍경은 ‘풍경’이 내포하는 모든 것을 따르고도 늘 풍경 자체와 멀어진다. 이는 김효진이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장소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 풍경, 배경, 장소의 공통점은 그들이 언제나 화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주객 이분법이 전하듯 풍경은 그것의 수동성으로 말미암아 객체가 된다. 화자는 이동할 수 있지만 풍경은 어느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어느 것과도 분리될 수 있지만 풍경은 결속된 채로 연속된다. 눈을 감은 찰나에도, 자리를 비운 잠시간에도 그들은 그대로다. 그러나 포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에코의 초상》에서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있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인데 그것은 영원히 눈앞에서 멀어지려 한다.
〈질풍지경초 엄상식정목〉은 〈89°15’〉와 〈난기류〉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풍경 앞에서 김효진은 “거센 바람이 불어야 강한 풀임을 안다”고 적었다. 그러나 문장은 ‘바람 앞에 존재를 위협받지 않는 풀’이라는 통념적 사실에 잠시 머물렀다 이내 ‘거센 바람을 만들어내는 풀’이라는 미적 진실로 오래간 나아간다. 일관된 표면으로 고정되지 않고, 울렁이며 요동치는 풀을 두고 우리의 시선은 어느 곳에도 안착할 수 없다. 형상의 반복은 화자가 신경 썼던 시점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반복이 낳는 차이는 시점이 시선을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난 듯한 착각을 일구어낸다. 정지된 것 사이로도 화자는 같은 것을 결코 볼 수 없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처럼 색은 무엇을 향한다는 의미 없이 낙하하고, 추락한 너울은 캔버스의 영토를 이탈해 이역異域에서 스스로 이방인이 된다. 이때 생성에 가담하는 것은 주체로 발음된 화자가 아니라 객체인 풍경이다. 풀이 눕고 일어나는 동작의 원인이었던 바람은 이제 움직임의 결과가 된다. 우리는 그 동선 앞에서 그들이 질주하며 조성한 바람과 서리를 맞는다. 앉아 있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일 때만 앉아 있는 풀. 그는 객체성을 탈각하고 스스로를 타자의 어울림 속으로 개방하는 존재다. 전시가 풍경이 아닌 초상이라 이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사실의 편에서 볼 때 ‘에코’라 지시되는 대상은, 늘 도리 없이 주체의 권능을 지닌 존재에게 휘둘린다. 그러나 전시의 혼돈 안에서 그들은 이 휘둘림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다시 말해서 에코는 사태를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고’에서, 제힘으로 새 삶을 만들어내는 ‘사건’으로 발화시킨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미 닥친 사건을 미래의 시제로 다시 욕망한다. 언제고 필요로 하지 않았던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제 내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다. 바람(〈89°15’〉)에서 〈난기류〉, 〈변이지역〉, 좌절(〈트로이 메라이〉)이르기 까지 김효진은 생보다 소멸에 더 가까운 곳에 초목을 두고, 그들의 존재를 묻는다. 작가는 “이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 나”갈지,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질문했고, 때로는 상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고 짐작하기도 하지만 이내 결론짓지 않은 채로 서술을 멈추었다. 언급한 것처럼 이들의 선택은 제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작가가 작업에 대해서 단호함을 내려놓을 때, 대상은 작가의 손을 떠나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작가가 멈춰선 물음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제 무능한 언어를 학대한 흔적이라면, 그가 모른 체하는 작업은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날뛴 축제의 흔적이다.
〈변이지역〉과 〈트로이 메라이〉에 담긴 풍경은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장소다. 다시 말하자. 이 장소가 낯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간이 아닌 질풍과 서리를 토하며 질주해 온 이들이 낯설어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들은 수직의 높이를 갖는 대신 수평으로 스며들기로 했으며, 젖은 습기를 거머쥐기보다 건조해지기로 한다. 그러나 초목은 이 순간 가장 뜨겁다. 주행의 형상은 미래에 힘의 소진을 예정하지만, 정지의 형상은 역설적이게도 미래에 주행할 힘을 잠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열기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이와 같은 말은 수상쩍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투항과 패배에 거리를 둔다. 사랑은 이별로 혁명은 복고로, 일생을 내건 약속에도 배신과 회귀는 찾아온다. 폭력, 반역, 변칙, 질병… 문제는 이미 한 번 있었고, 여러 번 있었으며, 그렇게 다시 되돌아올 것이다. 작가의 사실주의는 잔인하다. 아니 진실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잔인하다. 이 매듭은 어떻게든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회복의 말짓보다, 사태를 필연으로 정당화하는 긍정의 몸짓으로 이행된다. 이것은 결론이기보다 결심이며, 신념이기보다 각오다. 그런 한에서 객체는 주체로, 가담자로 나아간다. 그러니 희망은 남은 가능성이 아니라, 희망을 믿는 능력에서 비롯될 것이다. 에코는 여행을 쉴 수 없으니, 생을 그 찌꺼기까지 다 마신다.
〈우당탕퉁탕〉. 분명 화자는 소리 나지 않는 풍경 위로 어떤 음성에 귀 기울인다. 초목의 움직임이 수동적인 떠밀림이 아닌 스스로의 동작이라면, 이제 이들이 내는 속삭임을 울음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울음이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웃음의 원인은 내부에 위치한다. 에코는 웃는다. 처음엔 울지 않고자 지어야 했던 초목의 웃음이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부딪친” 탓에 웃을 수 있어 미소를 짓는다. 몸을 베이고, 팔다리가 흩어지고, 산발이 된 머리는 이제 전부라기보다 무엇의 부분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전체를 비추지 않고 부분에 매인 거울은 초목의 쪼개진 몸을 더욱 조각으로 만든다. 그러나 모든 가장자리마다 떠오르는 별처럼, 토르소는 어떤 식으로 변주되든 삶의 전부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들은 거울을 조각난 일부를 살피는 데 사용하지 않고 전체의 생을 비추어 기술하는 데 사용한다. 각자의 생은 〈드로잉 시리즈〉에 적혔다. 초목은 도착하고도 서두름을 그치지 않는다. 나는 여직 그들을 좇고 있다. 동선이 끝난 곳에서 다시 〈질풍지경초 엄상식정목〉. 시작점으로 돌아온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인데 그것은 ‘다시’ 영원히 눈앞에서 멀어진다. 출발한 적도 없이 목적지에 닿는 풀잎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던가.
3
홍예지가 빌려온 문장처럼 사고에 휘말리는 존재가 아닌 사건을 원하는 존재는, 그리고 이다지도 영원히 시작하는 존재에게 “시간은 늘 한가운데”에 있다. 늘 우리의 시간은 정오다. 누군가는 시계가 시간을 재는 도구라 전하지만, 나는 시계가 겨우 스스로를 측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간이 절대적이고 고매한 추상이 아니라 해와 달, 별의 구체적인 낯을 기준으로 삼듯, 시간을 고작 존재의 흐름이라 믿어보려 한다. 그러니 여러 해가 지나가도 이별한 그 자리에 있을 때 밤은 쉽게 해고되어 나를 과거에 붙들고, 배신한 혁명과 우연히 만나 마음이 달뜰 때 내 몸은 금세 미래로 가버리지 않았던가. 나 역시 지구를 쥐고 달리는 초목처럼 시간을 만들고 있다. 감정이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서글프다. 그러나 감정은 개체 내부의 표현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랑과 혁명의 과정은 떨림과 추락, 뜨거움과 차가움, 젖음과 건조처럼 어떤 움직임으로만 서술될 수 있다. 움직임에 한에서, 초목 더 나아가 사물은 인간과 동등하게 존재한다. 고정된 실체의 세계가 아닌 양태와 변이들의 세계. 이곳에서만 우리는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로 갈 수 있는 주권자일 수 있다. 감히 모든 사랑과 혁명이 실패했다고 말해지고도 다시 누군가 나선다면, 그것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울면서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 이들 탓일 테다.
숨어 있는 화자는 들판에 서서 바람이 초목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있다. 넘어지거나 스러진, 설운 이의 긴 목덜미에 닿는 풀잎의 초록 입술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다. 내가 푸르게 물들 때까지, 파르르 떨릴 때까지. 너는 그렇게 삶을 껴안는다. 취해 하루종일 넘어졌다 일어나도 나는 집에 올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기 즐거움이 있는 게 틀림없다.
참조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창작과비평사, 1988
릴케, 손재준 옮김,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두이노의 비가』, 2014
신형철, “김수영 시에 나타난 `사랑`과 `죽음`의 의미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2002
———, 「어떤 순간의 진심-신철규 〈유빙〉」,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윌리엄 워즈워스, 윤준 옮김, 「초봄에 지은 시」, 『워즈워스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프리드리히 니체, 안성찬, 홍사연 옮김, 『즐거운 학문·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책세상, 2005
홍예지, 《에코의 초상》(8. 1~8. 29 김희수아트센터) 전시 서문, 2022
황현산, 「전원일기」,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3
▲ 김효진 ⟪에코의 초상⟫ 도록에 부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