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21, 개관전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
미술평론가 이일(1932~97).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불모지에서 미술비평의 개념을 정립한 1세대 비평가로 손꼽힌다.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일의 장녀 이유진이 서초구 반포동에 스페이스21을 개관하고, 개관전으로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5. 10~6. 24)을 열었다. 1970년대 AG그룹에서 이일과 함께 활동한 김구림 박석원 서승원 심문섭 이강소 이승조 이승택 최명영 하종현 등 9인의 작품으로 이일의 비평 세계를 재조명한다.
1970년대 AG그룹 전시 출품작부터 신작까지 현대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거장들의 작품 19점이 출품됐지만, 이번 기획전의 중심은 작품이 아니라 비평이다. 이러한 기획 의도에 맞추어, 전시는 공간 중앙에 당시 네 차례 출간됐던 AG그룹 출판물과 도록, 이일의 친필 원고 등 비평 아카이브를 배치했다. 또 여기에 그 의의를 되짚기 위한 AG그룹 작가의 인터뷰 영상도 선보였다. 참여 작가들은 생생한 육성으로 이일과의 비평적 교감을 회고했다.
‘확산’과 ‘환원’의 역학
비평이 중추가 되는 기획전. 아이러니하게 들리는 이 같은 큐레이션이 가능한 이유는 이일의 비평이 한국 미술계에 선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비평은 일반적으로 작품의 후발 주자로서 나오는 부산물이지 작품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일은 달랐다. 이일은 1957년 파리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몇 안 되는 유학파였고, 해외 미술동향에 목말라하던 신진 작가에게 그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수와 같았다. 귀국 후 홍익대 교수가 된 이일은 팝아트, 네오다다, 해프닝과 같은 최신 해외 사조를 한국 미술계에 소개하며 실험과 전위의 산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는 곧 한국 현대예술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청년작가연립전> 세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청년작가연립전> 세대는 70년대에 이르러 AG그룹으로 다시 집결했다. 선생과 제자에서 동료로 만난 이들은 국내 화단에 파격을 이끌었다. 당시 AG그룹의 작품은 이일이 제시한 두 단어 ‘환원과 확산의 역학’으로 요약된다. “예술은 가장 근원적이며 단일적인 상태로 수렴하면서 동시에 과학 문명의 복잡다기한 세포에 침투하며, 또는 생경한 물질로 치환되며, 또는 순수한 관념에서 무상의 행위로 확장된다.” 확산은 추상표현주의를 극복한 오브제미술, 환원은 지각 실험과 기하학적 추상 등 미니멀리즘 경향으로 예술가 사이에 번졌다.
방법적인 면에서 볼 때 김구림, 이강소, 박석원을 비롯한 해프너들은 미술의 ‘확산’을 꾀했다. 반면 최명영, 심문섭, 서승원 등 단색화 작가들은 회화 중심의 밀도 있는 ‘환원’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전자가 미술의 외연을 확장해 ‘확산’과 닿아있다면, 후자는 한국 고유의 미학을 내면화했다는 점에서 ‘환원’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한편 이일은 두 개념을 연장해 1980년대에 ‘축적과 반복’이라는 단색화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화법은 수많은 단색화 계열의 화가가 탄생하는 요체가 됐다. 현장 비평가로서 이일은 다수 개인전 서문과 평문으로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고, 단색화 운동이 80년대 민중미술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화단의 중심에 굳건히 존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이일 비평의 소산이자, 그의 개념을 이해하도록 돕는 길잡이다. 가령 이일은 1984년 현대화랑에서 진행한 하종현 개인전을 두고 이렇게 썼다. “모노크롬 경향의 회화가 대개 비물질을 지향하고 있는 데 반해 작가는 철저하게 색채를 마대와 동질화시킨다. 즉 색을 마대 텍스처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하종현의 신작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말이다. 이일이 말하듯 <접합 23-02>(2023)에서 드러난 원색과 마티에르는 시각성보다 마대의 결, 질감이라는 물질성으로 환원된다. 또한 물감을 바르고 미는 행위의 되풀이는 ‘축적과 반복’의 방법론으로 읽을 수 있다.
1979년에 쓴 글은 박석원의 조각을 ‘확산’의 개념으로 풀어냈다. “조각은 세계의 리듬을 느끼는 문제다. 그리고 그 리듬은 반복이다. 확산은 일종의 이중화이며 그의 작품 세계에서 꽉 찬 것과 비어 있는 것, 빛과 그림자의 대위법으로 구성된다.” 작가의 조각은 같은 형태가 반복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출품된 <핸들106-A>(1968)와 <핸들 6909>(1969)는 작은 원이 반복되며 뻗어나가는 과정을 거쳐 소조로 완성된다. 반복의 리듬으로 크기와 디테일 등의 차이를 만들어 이중화하고, 서로 단조롭지 않도록 보완해 대위법에 접근한다.
『아트인컬처』 2023년 6월호🅰